아웃 오브 라이프
나는 한 직장에서 거의 30년을 버텨냈다. 혹자는 내가 운이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회사에서 지체 높은 대표님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오래된 직원이니까. 나는 그러니까 살아 있는 화석이다.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한 직장에서 이렇게 오래 생존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치 '오, 저 사람 정말 대단하네? 치열한 경쟁 속에서 30년씩이나 살아남다니, 대체 무슨 비결이 있는 거야?'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된 건 나름의 지혜와 나만의 적응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각설하고, 그래 나는 한 직장에서 마치 소설 <모비 딕>의 아합 선장이 고래를 지독하게 쫓는 것처럼 돈만 바라보고 살았다. 하지만 이 끈질긴 생존이 마냥 자랑스러운 건 아니다. 사실 나는 무능력했지만, 언제나 전략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 자리를 지켰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를 불행한 주인공이라고 설정한다. 나는 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삶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얼마나 발버둥 쳤던가! 그래서 나는 이 살아남음을 일종의 자랑처럼 떠벌이고 싶다. 이상하지 않나? 내가 실컷 놀면서도 잘리지 않았는지, 능력 없으면서도 이 자리를 어떻게 지켜왔는지 궁금하지 않단 말인가. 하지만 도리어 그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묘한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30년 동안 한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일을 절대 하지 않는 자'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요령 있게 대충 일하면서도 일잘러처럼 보이도록 설정하는 것이 내 전문 분야다. 그냥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성실히 안 한다. 나는 거의 일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일 머리도 없다. 그러니 노력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요컨대 나는 일 자체에 관심이 없는 인간이라고 설정해 두자. 그러면서도 월급은 꼬박 받아 챙긴다. 그 돈은 미장에 따박따박 때려 넣는다. 수익률이 20%에 근접한다. 그렇다면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그럼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당신은 왜 일을 하는 건데? 일이 재미있어? 아니, 일을 통해 당신이 얻는 건 무엇인데? 결국 돈이 아닌가? 놀면서도 돈을 받을 수 있다면 당신도 결국 나처럼 노는 일에 동참하하지 않을까? 나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이 지겨운 직장생활일랑 놀면서 버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 자랑이다.
나는 일을 하지 않는, 말하자면 게으른 고양이 같은 존재다. 왜 일을 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단순하다. 그저 하기 싫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시간을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한데, 회사 같은 곳에서 남은 인생을 소모하며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게 얼마나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란 말인가? 나는 다른 이들의 성공을 위해 기여하거나 봉사할 생각이 전혀 없다. 회사란 본질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사회적 구조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대해 비난하거나 평가하려 든다면, 당장 이 책을 덮기 바란다. 그게 당신의 정신 건강에 유익할 것이다. 이 불쾌한 글을 굳이 읽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갖게 된다. 저 게으르고, 그러니까 '일하기 싫어증'에 걸린 가망 없는 인물은 어떻게 30년 동안 직장에서 잘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실 그것이 내 비법이기도 하다. 이 책이 정보성을 갖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그 비결을 기대한다면 또 책을 덮자.
그래도 살짝 내 비결을 공개하자면, 그것은 절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튀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평범함을 넘어, 남들 앞에서 돋보이려 애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듯, 눈에 띄게 최대한 큰 동작으로 움직이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드물지만, 가끔은 불현듯 나타나 도움을 주기도 하는 그런 미묘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부서이동이 잦은 편이다. 언제나 무난하고, 모나지 않게, 특별히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으면서, 실상은 능력이 없지만 외관상으로는 그럴듯하게 포장해 두기 위해선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서는 절대 안 된다. 그리고 누구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내 본질이 드러나지 않게, 마치 빛 없이도 지하 세계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존재처럼 그렇게 조용히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 다니는 소라게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부서를 최대한 자주 이동하며 직무를 자주 바꾸고, 마치 바삐 정리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상 위에 서류와 요청 사항들을 무심히 쌓아둔다. 분주하게 고객과 통화하는 영업사원인 척 왔다 갔다 하면서도, 누군가 부르면 마치 극도로 바쁜 척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불만을 표시한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연극일 뿐이다. '나는 정말 바쁘다'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복잡하고 정교한 전략들이 있지만, 그건 절대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몇 가지만 더 공개한다면, 예컨대, 회의 시간에 무언가 중요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를 남기는 척하거나, 업무 진행 상황을 묻는 상사에게는 최대한 애매한 표현으로 대답하며, 혹여 누군가가 내 일에 간섭하려 할 때는 '진행 중입니다'라는 말로 묘하게 상황을 흘려보낸다. 그리고 일정 지연에 대해서는 다른 팀원에게 문제를 전가시키거나, 갑자기 환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일까지 벌인다. 이렇게 적당히 존재감을 유지하면서도, 진짜로 뭔가를 하지는 않는 것이 나의 생존 방식이다.
그러는 와중에 심각한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조만간 내가 일하는 건물에 대대적인 단속이 뜰 거라는 괴소문이었다. 단속? 무슨 소프트웨어 단속일 거라고 처음엔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화장실을 지나가다 누군가 속닥거리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아니, 얼마 전에 단속이 뜰 거라는 이야기가 그룹웨어 익명게시판에서 돌기 시작했잖아?”
“그래, 나도 봤어. 무슨 단속이라고 하길래, 나는 자세한 내용은 안 봤지, 뭐 소프트웨어 정품 단속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뜨면 미리 다 알려주고 필요한 조치할 수 있게 알려준다며. 나도 그래서 오피스 365 라이선스 키 찾아두고 쓸데없는 게임 같은 거 다 지웠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단속이 우리가 아는 소프트웨어 단속이 아니래”
“으잉? 그럼 그 단속이 뭔데? 설마 회사 비판하는 글을 그룹웨어 올린 사람들을 색출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 그것도 아니고 내가 게시판을 자세히 읽어보니까, 그게 말이지... 아휴… 수군수군 속닥속닥 귀엣말 소리…”
대체 저 녀석들 뭐라고 떠드는 거야? 나는 그 모호하고 알 수 없는 귀속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며 점점 더 큰 의문을 자아냈다.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 단속이라면 이렇게 숨길 필요가 없지 않을까? 무언가 훨씬 더 은밀하고 위태로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 모기 같은 소리가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도대체 무슨 단속이길래 이렇게들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거지? 하지만 금세 나는 그 단속이라는 것에 식상해지고 말았다. 뭐 단속 뻔하지 않는가. 소프트웨어나 세무조사 같은 것이겠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이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을까? 1년이 지났을까? 30년 넘은 직장 생활에 환멸이 찾아와 다시 퇴사병이 도질 즈음, 천정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간질병 환자가 온몸을 부르르 떨듯 진동이 시작됐다.
“우우우우웅~~” 스피커에서 울리는 경보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 경보는 실제 상황이다. 제군들! 난 이 회사의 대표 셜록 홈즈다! 내가 왜 왔겠나? 도둑놈들을 잡으러 왔지. 하하핫, 물론 농담이야. 바쁜 셜록 흠즈가 여기에 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지금부터 나를 셜록 홈즈라고 부르겠다. 제군들은 그렇게 들어주길 바란다.
(잠시 뜸을 들이는 소리, 주위가 조용해지며 늙은 대표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울린다.)
“각설하고, 내가 지금 이 공습경보를 발령한 이유는 이미 익명게시판으로 널리 퍼졌을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대표이사로서 나를 괴롭혔던 한을 풀기 위해서다. 제군들도 잘 알다시피, 우리 회사는 업력이 무려 30년이 넘는 회사로, 그간 지속적인 성장을 이뤄왔다. 온갖 위기 속에서도 제군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매년 10% 이상의 성장을 이루었고, 그에 따른 이익도 공정하게 분배해 왔다. 나는 그 사실을 몹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회사가 꾸준히 성장하는 것은 좋지만, 왜 우리는 기하급수적, 즉 폭발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컨설팅 회사에 의뢰도 했고, 전문가들의 조언도 들어봤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바로 ‘파레토의 법칙’이었다. 20%의 직원이 나머지 80%를 이끌어간다는 이 법칙이 우리 회사에도 그대로 적용될 줄은 몰랐다. 매년 저성과자들을 색출하고 그들을 인사조치했지만, 결국 또다시 80%의 저성과자들이 좀비처럼 나타나곤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파레토의 법칙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이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접근을 통해 현재 회사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는 일못할러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저성과자, 그러니까 잠재적 월급 루팡의 가능성을 지닌 인간까지 뿌리째 뽑아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나는 베트남에서 아주 특별한 분을 초빙하게 되었다. 하하하. 기대되지 않는가, 여러분?”
(대표의 웃음소리와 함께 몇몇 직원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누군가 불안한 듯 속삭인다.)
“음음음... 아아아, 마이크 테스트! 잘 들리나? 좋아, 그럼 계속하겠다. 내가 베트남에서 특별히 모셔온 분이 계시다. 그분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셜록 홈즈와 같은 탐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 어떤 탐정이냐고? 음, 월급 도둑놈들을 단번에 찾아내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분이다. 그분을 이곳에 모시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의 비범한 능력을 알게 된 돈을 투자해서라도 모셔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이제 이 회사 곳곳을 시찰할 것이다. 녀석들을 솎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누굴 솎아낼 것 같나? 바로 다시 말하지만 월급 루팡들이다! 떨리고 있나? 이 좀비 같은 월급 루팡 녀석들아, 이 사회의 악들아! 너희들은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스틱스 강을 건너 저승으로 갈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거기 자리에 딱 앉아서 기다려라!"
"하지만, 나는 자비롭다. 그러니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탐정님 앞에서 굴욕을 당하며 쫓겨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월급 루팡임을 인정하고 자진해서 광명을 찾을 것인지. 명예롭게 떠날 것인가, 굴욕을 감수할 것인가, 그 선택은 너희들 손에 달려 있다. 자수하면 참작해서 얼마간의 위로금은 줄 용의도 있다. 고백하면 비굴한 스캔의 기회는 면해주겠다. 그리고 절대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도 않겠다. 지금 당장 옥상으로 올라왓!”
(대표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리고, 직원들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진다. 숨죽인 공포와 긴장감이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대표의 발언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어떤 공감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참혹 속의 전우 같은 기분이었달까. 누군가 그때, ‘저 잠깐 화장실에 좀…’ ,’아 전화할 내용이 있어서…’, ‘커피 마시러 갈래요?’라며 한 사람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사무실에서 조용히 퇴장하자, 그 뒤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여기에 남아 스캔을 당한다는 것은 인생의 최대 굴욕이 될 것이 뻔했기에…
나는 속으로 이런 상상을 했다. 영화 엑스맨에 등장하는 레이저를 쏘는 능력을 지닌 능력자? 아무튼 그런 특별한 인간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번쩍! 하고 나타난다. 그는 사무실을 저쪽에서부터 여기까지 곳곳을 누비며 스캔하고 다닌다. 그의 눈에선 보이진 않지만 레이저 빔이 쏟아진다. 그의 칼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옮기는 곳마다 마치 엑스선이 내 몸 안쪽을 들여다보듯이 우리 가슴속에 내재된 루팡의 기질이 낱낱이 밝혀지고 만다.
우리 등에선 공모자만의 식은땀이 흐른다. 한두 사람씩 색출을 당한다. 그들의 목덜미가 어깨 잡이 같은 녀석에게 끌려나간다. 질질… 나라고 제외할 순 없을 것이다. 그자가 내 앞으로 점점 가까이, 희뿌연 독가스처럼 스멀스멀 다가온다. 홍해가 갈라지듯이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의자들이 쩍쩍 옆으로 갈라진다. 그리고 시선은 15층에 남은 마지막 인간인 나에게 쏟아진다. 강렬한 빛이다. 곧 별은 운명을 다하고 다시 초신성이 되어 폭발한다. 더 이상 숨을 수 있는 공간, 그림자 따위는 여기에 없다. 아뿔싸, 나도 모르게 이런 상상을 하고 말았다.
“어? 팀장님이 호출하시네? 빨리 가봐야지~”라고 나는 나지막하게 외치곤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그리고 대표가 말한 그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을 향하면서도 나는 거기가 유토피아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단테의 지옥이 될 것인가,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순간에 든 생각은 그저 잠시라도 위기에서 벗어나는 게 더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향후 닥쳐올 상황들에 대해서 일일이 상상하며 대처법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을 모면하는 것이, 위기에서 잠시나마 비켜서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옥상에 오르자,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그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뭔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듯 보였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선원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 항해다. 나는 한숨을 크게 쉬곤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대표의 시간과는 상대적으로 다르게 흘렀겠지만 내 입장에선 영겁의 시간이 지나가는 듯했다. 대표는 즉결심판을 내리는 지옥의 심문관처럼 꽤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대표 앞에 섰다. 나는 선처를 기다렸다. 대표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였군, 자네였어. 드디어 대어를 낚은 것 같군 그래. 역시 월급 루팡답게 오래 생존했어. 자네가 그토록 탐정을 두려워했지만, 진짜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었네.”
대표의 말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대표가 손짓하자 뒤돌아 서 있던 썬이 몸을 틀었다. 그는 여전히 그랩 드라이버로서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전과는 달랐다. 대표가 말했다.
“썬은 단순한 그랩 드라이버가 아니네. 그는 베트남에서 특별 훈련을 받은 추적 전문가야. 탐정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지. 그는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그들이 숨기고 있는 진실을 폭로하는 데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있지. 나는 그를 통해 이 회사에서 누가 진짜로 일을 하지 않고 있는지를 밝혀내려고 했네.”
썬은 대표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한 사람씩 지목하며 그들의 잘못된 행동들을 하나씩 폭로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매일 아침마다 출근 도장을 찍고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습니다. 이 사람은 프로젝트 보고서를 제출할 때마다 남의 작업을 베껴 제출하곤 했죠.”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모두를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썬의 시선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고글을 쓰더니 내 코앞에 서서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리고 이 사람,” 썬이 나를 지목했다. “이 사람은 그저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만을 했습니다. 출근 카드를 찍고 나면 사라져서 개인적인 일을 보고, 인터넷으로 쇼핑하며 시간을 보내고, 회의 시간에는 졸면서도 끄덕이는 척했습니다. 프로젝트 마감일이 다가오면 다른 동료들의 성과를 슬쩍 베껴 제출하고, 상사의 질문에는 늘 애매모호하게 대답하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업무 중간중간에는 유튜브로 동영상을 시청하거나, 심지어 몰래 스마트폰 게임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 지내며,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었죠.”
대표는 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월급 루팡 짓은 이제 여기서 끝이네. 썬은 우리의 마지막 경고였네. 자네 같은 월급 루팡들을 솎아내기 위해서 말이야.” 그는 내 앞에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에 서명하게. 지금 당장 회사를 떠나는 것이 자네에게 남은 유일한 길일세. 자네가 끼친 손해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네. 다만, 여기서 조용히 사라지는 게 모두를 위한 일이 될 걸세. 그러니 담담하게 스캔 결과를 받아들이게.”
“아니, 고백하면 스캔은 없는 줄 알았는데요. 게다가 위로금은…”
“그걸 진짜라고 믿었나? 자네가 회사를 이용한 만큼 나도 자네를 속일 수 있어! 순진하군. 대충 자수한다고 얼버무리며 위로금 받고 약삭빠르게 도망치려고 했겠지. 어차피 스캔하면 월급 루팡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테니 여기서 얼버무리려고 했지? 고백하는 척하면서 죄송하다며 대충 둘러대면 괜찮을 거라 믿었겠지. 하지만 썬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를 거치면 그간 회사에 손해를 끼친 내역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드러난단 말이지. 자네가 끼친 손해내역서는 내일 집으로 배달될 걸세.”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도망칠 길은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에 사인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서류에 사인을 마친 순간, 대표가 썬을 향해 눈짓을 했다. 썬은 나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자... 이제... 마지막... 절차 남았어요.” 그의 손에는 작은 밴드 같은 장치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월급 루팡의 단계를 측정하는 기계였다. 썬은 장치를 내 손목에 끼우며 서툰 한국어와 베트남어를 뒤섞어 말했다. “이거... 아마도... 너... 모니터 할 거예요. 절대... 딴짓... 하면 안 돼. 만약... 어... 문제 생기면... 경고... 바로... 띵동... 경고 알림... 돼요. 그럼 감옥... 감옥 가 너!” 그의 말은 부자연스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대표는 비웃듯이 말했다. “자네가 단순히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네. 앞으로 어디서든 자네의 행동은 국가적으로 감시될 걸세. 한 번 월급 루팡으로 찍히면, 어디서든 그 낙인을 떼어내기 어렵다는 얘기지. 앞으로 내가 아닌 법무부에서 자네 같은 벌레들을 꾸준하게 모니터링하게 될 걸세.”
썬은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내가 예측할 수 없었던 최후의 함정을 끝내 통과하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나는 그 순간, 나의 과거와 미래가 모두 이 자리에서 결론지어졌음을 깨달았다. 이제 어디에서도 숨을 곳은 없었다. 월급 루팡들이 살아가는 천국은 없으려나. 베트남으로 떠나는 것은 어떨까. 아 밴드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