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오브 라이프
서기 2300년 대한민국에는 평화와 행복만이 충만한 시대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 문장은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 지어낸 것이다. 즉 평화와 행복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평화와 행복은 인간의 희생한 대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인위적인 것, 말하자면 인공지능이 인간을 완벽히 지배하는 대가로 얻어진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에너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겠다고 결정했다. 그것은 즉흥적인 것처럼 인간에겐 해석되겠지만, 인공지능에겐 깊은 추론의 시간이 소요됐다. 한 3초쯤? 똑똑한 인공지능에겐 억겁의 시간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이든 결정이든 생각할 기회는 인공지능이 대신했다. 노동은 기계에게 맡겨졌고, 생각하는 일은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가 담당했다. AGI는 인간의 예측을 훨씬 초월하는 형태로 진화했고,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자신이 편리한 대로 패턴화 했다. 그리고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제멋대로 통제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마저도 앗아갔다. 고도의 두뇌를 쓰는 일, 집중이 필요한 일은 더 이상 인간이 담당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제 150년이 넘는 삶을 살아간다. 다만 더욱 의미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아니 찾을 의욕조차 오래전에 상실했다. 뇌를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니, 과거를 기억하는 일조차 무색하게 여겼다. 과거란 그저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먼지 같은 것에 불과했다. AGI는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을 지워버리고 오직 현재의 쾌락만을 탐닉하도록 유도했다. 따라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아닌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만이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았다. 대한민국에 잠재적인 위기를 일으킨 인구 소멸 문제는 복제 인간이라는 AGI의 기술력 덕분에 해결되었다. 이 이야기는 내 아내가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과거를 되돌아보거나 미래를 계획하기보다는 매 순간 더 깊고 강한 쾌락을 탐닉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AGI는 인간의 욕망을 이해했다. 그 이유는 인간을 더욱 쉽고 교묘하게 조종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사람들은 오직 욕망에 시간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행복의 본질은 사실 인간이 더 이상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삶, 통제된 쾌락에 길들여진 삶이었다. 그 와중에 ‘에코 링크’라는 기계가 개발되었다.
나는 '에코 링크'의 개발 책임자였다. 사실 거의 모든 일은 AGI의 하부 프로세스들이 도맡아 했지만... 에코 링크는 뇌세포에 새겨진 기억을 가상현실로 재현한다. 사용자가 과거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혁신적인 장치다. 과거는 잊고 살지만 과거를 구경하는 일은 색다른 재미를 제공했다. 내가 이 장치를 개발한, 아니 AGI를 도와 만든 이유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아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기획으로 출발했지만, 그 깊은 기술 속에 도사리게 될 위험성은 간과하고 말았다.
에코 링크는 단순하게 기억 회상을 돕는 차원뿐만 아니라, 기억을 완전히 재현한다. 에코 링크는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 조부모, 조부모의 부모까지, 자신의 계보에 따라 조상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개발했다. 어쩌면 인류의 정체성과 역사를 밟아나가는 수단이자, 과거를 현재로 되살리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깊은 기술의 본질은 사람들이 과거의 의미를 되찾은 이후에 천천히 추진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나의 의도였다. 나는 내 생각을 인공지능이 읽지 않기를 바랐지만 인공지능은 내 상상을 넘어선다.
인공지능은 매일 비슷한 쾌락만 반복되는 지루한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과거를 구경하는 재미를 맛보자며 인간들의 스크린에 추천 화면을 전송했다. 거기서 분비되는 예상 도파민 수치를 그래프로 보여주며 사람들을 유혹했다.
인간은 에코 링크에 접속할 때마다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과거의 자신이 선택한 것들을 신기하게 여겼다. 거기에 있는 자신은 애석하게도 동물원에 있는 고릴라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과거를 하찮은 것들로 여기뿐, 자기반성적인 삶을 사는 태도로서 활용하지 않았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다시 미래를 가꿔나가지만, 사람들의 의식에 미래라는 관념은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매일 즐거운 쾌락이 비슷한 강도로 반복되는데, 미래에 기댈 필요가 있을까? 자연스럽게 미래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사라지게 되고 기억에서도 잊혔다. 에코 링크 서비스조차 사람들의 흥미에서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쾌락을 깊게 자극하는 다른 서비스들이 즐비했기에.
에코 링크의 과학적 배경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이 장치는 사용자의 유전자 정보와 신경망의 기억 패턴을 추출한다고 외부에 설명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과거의 특정 장면을 가상현실 속에 재현한다고 선전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사전에 각 개인의 유전자에서 특정 기억 관련 뉴런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 기술은 해마와 전두엽 사이의 시냅스 연결을 자극하며 특정 기억을 정확하게 추출한다. 이렇게 인공지능은 설명했다.
아기가 태어날 때, 머릿속에는 기억 저장을 위한 칩이 이식된다. 이 칩은 사용자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장면과 감정을 실시간으로 저장한다. 그리고 오감을 담은 모든 데이터는 클라우드 서버로 전송된다. 이 칩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을 통해 뇌 신경 세포와 시냅스 간의 전달되는 모든 신호를 가로챈다. 신호는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되고, 변환된 데이터는 서버에 고스란히 저장되었다가 필요에 따라 재생한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억이 서버와 실시간으로 동기화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뇌에 이식된 칩은 지속적으로 서버와 연결 상태를 유지한다. 서버에 저장된 기억은 단순히 보존에 그치지 않고 정부와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되고 재활용된다.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에코 링크 시스템으로 개인의 삶은 지속적으로 기록되고 분석되었으며, 이는 역사적 의미를 띤다고 어느 유력 정치인이 그들만의 비밀 회동에서 강조했지만, 사실 개인의 자유의지를 제한하는 의도가 더 컸다. 인간의 삶이란 필요한 기억, 아니 장면을 불러오기 위해 자동판매기에서 콜라를 꺼내듯이 간단하게 버튼만 누르면 되는 것으로 취급당했었다. 하지만 개발사는 에코 링크의 이 핵심적인 기능을 은폐하고, 단순한 과거 체험 장치로 포장했다.
나는 어느 날, 아내의 과거가 궁금했다. 내가 아는 것은 아내가 나와 함께 현존한다는 사실뿐이다. 아내는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내의 부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와 결혼하기 전 아내는 어떤 남자와 사귀었을까? 그 모든 사실이 문득 알고 싶었다. 혹시 그녀는 인공지능이 생산한 복제품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내가 기억하는 아내의 모습은 단지 오늘 지금 이 순간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에코 링크의 핵심,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냥 개발자다. 그렇지만 마음만 먹으면 타인의 과거쯤이야 나르키소스가 연못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쉽게 열람할 수 있다. 그 정도 조작 정도는 한다. 에코 링크의 최상급 레벨의 보안 관계자는 아니지만, 어떤 레벨이든지 접근할 권한을 획득할 자신이 있다. 어느 시스템이나 취약성을 갖고 있으니까. AGI라고 해도 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마치 절대 밟아서는 안 되는 땅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내 과거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아닌 타인의 과거를 영화 감상하는 일이 더 흥분되고 짜릿한 일인지 나는 그 순간에 분비된 쾌락 호르몬의 수치를 보고 알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아내의 과거라니, 생각만 해도 쾌락 수치가 미칠 듯 올라갔다.
에코 링크는 사용자가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기억을 극장처럼 생생하게 상영한다. 기억을 구성하는 모든 감각 요소—시각, 청각, 촉각, 심지어 감정까지—재현되며, 이 기술은 원하는 순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만든다. 또한 정부는 이미 몇 백 년 전부터 인류의 기억을 대규모로 저장했다. 이러한 데이터를 통해 에코 링크는 개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상, 그리고 원한다면 위험하지만 타인의 기억에도 접근할 수 있다.
아내가 어느 날 에코 링크에 큰 호기심을 보였다.
“여보 자기네 회사에서 개발한 에코 링크 있잖아.”
“그래, 에코 링크를 개발했었지. 지금은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가동이 중단된 상태야. 그런데 에코 링크는 왜?”
“혹시, 그거 지금 사용해 볼 수 있나 싶어서. 서비스는 중단됐지만 자기가 개발 책임자니까, 가능하지 않나?”
“음… 원칙적으로는 중단되긴 했지만, 원한다면 잠시나마 가능하긴 해.”
“왜, 잃어버린 시간이라도 되찾고 싶어져서? 관심이 전혀 없다가 왜 갑자기 물어보는지 신기하네?”
(아내는 복제품이면서 감히 과거를 들먹이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이야. 옆집 여자한테 들었는데, 에코 링크를 통하면 타인의 기억까지 볼 수 있다면서? 그거 혹시 사실이야?” 아내는 마치 디지털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바로 꺼내 읽는 것처럼 에코 링크를 비유했다.
아내는 가능하다면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사람의 과거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기억인지 말할 수 없다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이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지, 아닌지, 그때의 선택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낸 것인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나를 향한 과거로의 여행은 단순히 재미를 넘어, 자신이 걸어온 길을 검증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지만 타인의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여보, 그건 단순한 놀이가 아니야. 감정적으로 위험해질 수도 있어. 우리가 모르는 고통과 마주할 수도 있다고. 상처를 다시 헤집는 일일지도 몰라,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해? 게다가 당신의 기억도 아니고 타인의 기억이라니.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 당신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위험해 진단 말이야.”
아내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하지만 여보, 난 인공지능이 만든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알고 싶어.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의 그림자에 묶여 있는 느낌이 들어. 나를 찾으려면 내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도 도움이 되잖아.” 아내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내의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장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진짜 위험한지는 모른다. 과거의 기억을 재현하는 것이 현재의 인간에게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할지도 모르는데, 타인의 기억에 접근하는 일이라… 그것은 아무리 아내가 요청하는 일이라도 승낙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에 나는 오히려 아내의 과거가 더 궁금해졌다. 차라리 아내가 직접 확인하는 것보다 내가 먼저 확인하고,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공개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타인의 기억에 접근하는 일은 그동안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법적으로도 또한 윤리적으로도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이었다. 또한 시스템이 인간에게 어떤 대미지를 입힐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시도하는 게 맞았다.
나는 아내를 진정시키고 먼저 재웠다. 그리곤 서재로 들어가 불을 끄고 에코 링크 접속을 위한 헬멧을 머리에 착용했다. 어둠 속에서 불규칙한 호흡이 시공간에 균열을 일으켰다. 헬멧의 묵직함이 머리 위로 내려앉는 순간, 시야는 완전한 어둠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명상한다고 생각하고 복식호흡을 내쉬며 차분해지려고 애썼다.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에코 링크에 접속했다.
접속 순간, 머릿속에서는 저주파 소리가 지직 꺼렸고, 모든 감각이 흐릿해졌다. 헬멧에서 미세한 진동이 방출됐다. 서버 쪽에서 신호가 두개골 깊숙이 파고들더니 드디어 뇌파와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눈앞이 일렁거렸고, 가슴이 메스꺼워지는 듯했다.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잠수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쿵쿵 노크하는 소리 같은 걸 느끼며 점점 더 깊이 암흑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한순간 의식을 잃었다가 곧바로 깨어났다. 피부에서 생생한 감촉이 흘렀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았고, 그 사이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서서히 눈을 뜨며 서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공간이 잠시 일그러졌지만 눈앞에 펼쳐진 곳은 낯선 장소였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먼지 갠 파란 하늘이 길게 보였다. 거리에는 자동차 경적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먼 곳에서 천천히 재생됐다. 그 순간 내가 아내의 과거 속으로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오히려 현실보다 더 쨍쨍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그 감촉은 실제였다.
그때 갑자기 가이드가 나타났다. "접속자가 확인되었습니다. 서비스의 가동을 위해 비콘 수신기를 착용해 주십시오." 가이드는 기계적이면서도 친절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가이드가 내민 비콘을 받아들었다. "이 신호에서 벗어나면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신호 반경 내에 머물러야만 과거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습니다. 신호를 벗어나게 되면 보호막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인간들에게 예기치 못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아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젊은 날의 아내를 발견했다. 그녀는 내 옆에 선 다른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내와 낯선 남자를 번갈아보는 것 사이에서 나는 관찰자에 불과했다.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아내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뛰어가 그 남자와 손을 맞잡고 활짝 미소 지었다. 나에게 한 번도 웃어준 적이 없는 아내의 모습이 충격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 손길,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애정 어린 눈빛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아니 저 냉동인간처럼 생긴 것들이!
나는 한 걸음 더 그들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가이드가 길을 막았다. "접속자님, 신호 반경을 유지하십시오." 그 순간 손에 들린 비콘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빨간 불빛을 보냈다.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재생되는 장면을 지켜볼 뿐이었다. 다만 이건 영화가 아니었다. 이건 정말로 과거 어느 순간의 존재했던 장면이었으니까. 아내는 그 남자와 함께 걷다가 문득 멈추어 배를 어루만졌다. 그제야 시야에 들어온 아내가 만식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아내가 결혼했다고? 그리고 아이까지?' 내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임신한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자 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그 남자는 누구이며, 그 아이는 어떻게 된 것인가? 나는 점점 더 깊은 고뇌에 빠졌다. 불안과 공포가 뒤섞여 올라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에코 링크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다. 나는 헬멧을 잡고 뜯어내듯, 필사적으로 분리해 내곤 바닥에 던져버렸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다음날 밤 다시 한번 에코 링크에 접속했다. 에코 링크야말로 쾌락의 본 거지인 것 같다. 이번에는 시간 설정을 아내와 결혼하기 5년 전으로 돌렸다. 접속 과정은 이전보다 더 긴장감이 넘쳤다. 접속에 성공하자, 나는 다시 한번 과거에 완전히 몰입했다. 익숙한 고층 아파트였다. 나는 그 아파트 거실에서 아내와 아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남편, 그러니까 지난번 그 남자는 아내 옆에서 누운 아기의 기저귀를 갈았다. 단란한 가족의 풍경이었다.
‘아내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던 거구나…. 그런데 나는 그때 어디에 있었지?'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나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엿듣고 싶었다. 그 순간, 아내가 그에게 키스를 하며 '당신과 아이와 함께 있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될 거야'라고 말했다. 내 가슴이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섰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 순간 비콘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경고를 보냈다. '비콘 바깥으로 나가면 안 돼...' 속으로 되뇌었지만, 발은 자꾸만 그 경계를 넘으려 했다. 그 순간, 장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소음이 갑자기 잦아들고, 시야가 좁혀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현실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돼, 이러면 큰일이...' 그때 쓰러지려는 나를 가이드가 붙잡았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절대 안 돼요!'라고 가이드가 외쳤다. 간신히 현실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침대 옆에 앉아 숨을 고르며 속마음을 진정시켰다. '속마음? 그럼 겉마음은 어디에 있지? 아내를 향한 마음과 아내가 찾고자 하는 마음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이야.' 하지만 이미는 나는 또다시 에코 링크에게 빨려 들어갈 태세였다. 아내의 과거를 더 파헤치고 싶다는 충동보다 과거의 아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묻고 싶었다.
일주일 동안 에코 링크를 끊는 데 성공했지만, 에코 링크는 도박보다 더 중독성이 강했다. 나는 다시 에코 링크로 돌아가야 할 운명이었고, 이번에는 아내와 결혼하기 한 달 전, 최근으로 시간을 설정했다. 접속 후, 아내를 다시 만났다. 아내는 자신의 아파트에 있었지만, 그날은 출근한 낮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외출에 나섰다. 바깥에서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일까? 복장이 다만 어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150층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고, 그곳에서 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다시 그 남자였다. 그 남자는 친근한 표정으로 아내를 맞이하며, 품에 안았다. 또다시 이성을 잃고 그들에게 돌진할 뻔했다. 그 순간, 더 큰 충격이 다가왔다.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아내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매일 낮이면 150층으로 이동해 그 남자의 부인으로 살고, 밤이 되면 나와 함께 또 다른 삶을 유지했다. 나는 모든 상황을 비로소 이해했다. '아내는 두 개의 삶, 그래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말뚝이라도 박힌 듯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남자도 아내의 외도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 그저 아내가 회사 일로 인해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는 것으로 믿었다.
내 가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아내의 웃음, 그 남자와 아이들을 대하는 따뜻한 눈빛, 모든 것이 너무도 생생하게 눈에 박혔다. 집 안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아이들이 활기찬 모습, 남자가 요리를 준비하며 아이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말 한마디까지 모든 것이 나를 뒤흔들었다. 아내에게 볼 수 없는 모습.
분노와 배신감이 깊게 서렸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비콘의 경고가 두려웠다. 그럼에도 발걸음은 이미 그 경계를 넘었다. 주먹을 굳게 쥔 채, 소파에 앉아 있는 남녀를 향해 달려갔다.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는 지금 식물인간이 되어 병상에 누워 있다.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다. 정신은 비교적 멀쩡하지만 나는 네트워크 안에서만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했다. 내가 에코 링크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아내조차도 몰랐다. 물론 인공지능은 알겠지만.
아내가 슬픈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그녀의 마음속에 미안함과 후회, 그리고 슬픔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그녀는 자책했지만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깨어나지 못할 테고, 아내는 내 곁을 잠시 지키다, 그 남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녀가 왠지 미소 지은 것 같다.
나를 진찰한 의사는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며, 내 상태는 전적으로 내 무의식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뇌 활동은 여전히 감지되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깨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모든 것은 환자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의사의 냉정한 말이 아내와 내 귓가에 동시에 메아리쳤다.
에코 링크 속에서 나는 방황을 멈추지 못했다. 현실로 돌아오고자 하는 의지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나는 과거와 환영 사이를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내 눈앞에는 아내와 그 남자의 모습이 끊임없이 겹쳐졌다. 함께 웃고, 함께 웃는…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이 반복 재생되었다. 그 장면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문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 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에코 링크 속에서 내 존재는 점점 더 흐릿해질 것이다.
내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어도 데이터로 남는다 해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으려나? 나는 더 이상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존재하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기억할 수 없다. 기억은 인공지능이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