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곳에 있다.

10장

by 지안

1. 내 안에 있는 신성


— 지고한 존재와 나의 관계

10장은 바가바드 기타의 전환점 중 하나다. 이전까지는 행위(카르마), 지혜(지나나), 헌신(박티)의 철학을 설파하던 크리슈나가 이제는 자신의 본질, 즉 ‘신성한 존재로서의 나’가 세상과 인간 안에서 어떻게 현현되는가를 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무한하고 신비한 신에 대한 외부적 숭배가 아니라 그 신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자각이다.


“신들과 현자들도 나의 기원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10.2)


이것은 모든 존재 이전에 존재하는 의식, 곧 시간과 공간의 조건을 초월한 근원적 실재로서의 ‘나’를 선언하는 말이다. 그런 크리슈나가 말한다.


“나를 태어나지도 않고 시작도 없는 자,

세계의 대주재로 아는 사람은

미혹에서 벗어나 모든 악에서 해방된다.” (10.3)


여기서 ‘알다’는 것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뿌리를 바꾸는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 크리슈나는 말한다. 지성과 덕성, 감정과 본성, 인간 안에 깃든 모든 특질은 모두 ‘나’에게서 비롯되었다.


“지혜, 용기, 자비, 평온함, 고통, 기쁨,

탄생과 죽음, 두려움과 명예…

이런 모든 것들은 나에게서 나온다.” (10.4–5 요약)


이 구절은 단지 “신이 모든 걸 만든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심리적·정신적·정서적 상태의 바탕에 신성한 원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배후에도, 우리가 겪는 ‘두려움’의 밑바닥에도, 존재를 유지하고 이끌어가는 어떤 ‘근원적 생명성’이 작용하고 있다. 크리슈나는 이어서 말한다.


“이 사실을 깊이 자각하는 사람은

사랑과 헌신으로 나를 섬긴다.

그는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다.” (10.7–8 요약)


즉, 참된 깨달음이란 외적인 세속이나 종교적 틀을 넘어 자기 존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아는 자각이다. 그 자각은 무언가를 ‘믿는다’는 신념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신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느낌에서 비롯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어느 곳에도 있는 신성함, '참나'를 아는 것이다.


이 장은 지금부터 그 신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수많은 상징을 통해 보여주지만, 그 모든 것은 이 한 문장에 응축된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요, 중간이요, 끝이다.” (10.20)


신성은 밖에 있지 않다. 그것은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힘, 내 마음을 감싸는 고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지켜보는 의식의 가장 깊은 자리다.





2. 나를 아는 사람


— 깨달음이란 신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이 장의 시작에서 크리슈나는 자신을 만물의 근원이라 말했고, 지금 그 근원을 진심으로 아는 사람, 곧 ‘나를 아는 사람’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나는 만물의 근원이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나온다.

이 사실을 깊은 의식 차원에서 깨달은 사람은

사랑과 헌신으로 나를 섬길 것이다.” (10.8)


여기서 중요한 말은 ‘깊은 의식 차원에서’라는 표현이다. 이 앎은 단순한 정보나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삶 전체가 바뀌는 자각이며, 존재 방식이 달라지는 앎이다. 그들은 단지 신의 이름을 외우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곧 크리슈나를 기억하는 하나의 움직임이 된다.


“그들은 생각을 나에게만 몰두하고,

온 힘을 나에게 쏟는다.

내가 누구인지 이야기하며

늘 만족하고 기쁨 속에 살아간다.” (10.9 요약)


이 구절은 경건하거나 도를 닦는 모습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의 기도처럼 흘러가는 상태를 묘사한다. 그들에게는 목표가 다르다. 일의 성과나 외적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 ‘그 무엇’에 닿는 것이 진짜 목적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크리슈나는 말한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존재의 중심에 머물러

지혜의 빛을 줄 것이다.” (10.11 요약)


이 말은 단순히 ‘신이 도움을 준다’는 위로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런 뜻에 가깝다. “네가 스스로를 비우고 진심으로 나를 향할 때, 그 마음 안에서 나는 깨어난다.” 여기서 크리슈나가 주는 빛은 어떤 외부의 지식이 아니라, 무지를 걷어내고 나의 본질을 드러내는 내면의 깨달음이다. 이 대목은 바가바드 기타 전체에서 박티(헌신)의 깊이를 가장 조용하게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진정한 앎은 단지 신의 정체를 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 전체를 ‘나 아닌 어떤 더 큰 생명성’에 정렬시키는 정직한 태도다. 그 삶은 조용하고 단단하다. 흔들려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기쁨은 결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머무를 수 있음’에서 비롯된다.





3. 당신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크리슈나는 앞서 “나는 모든 것의 시작이요, 중심이며, 끝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를 향하는 이에게 “나는 그의 마음속에 지혜의 빛을 비춘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르주나는 더 이상 이 관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크리슈나가 단순한 조언자, 친구, 혹은 스승이 아닌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나를 초월한 존재”라는 걸 깊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당신은 지고한 브라만이요,

무지를 멸하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저는 당신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내고 계신가요?” (10.12–16 요약)


이 장면은 매우 인간적이다. 누군가를 믿기 시작할 때, 우리는 더 알고 싶어진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당신의 모습을 내가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요? 아르주나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묻는다.


“저는 이제 당신을 향해 마음을 모으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디에 마음을 집중해야 하나요?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름으로 이 세상에 현현하고 있습니까?” (10.17–18 요약)


이 질문은 바가바드 기타 전체를 통틀어 “형상 없는 진리를 형상 안에서 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요청”이기도 하다. 우리도 아르주나처럼 ‘의식’, ‘신성’, ‘실재’라는 말은 듣지만, 막상 그것이 삶 속 어디에 깃들어 있는지, 무엇을 통해 그걸 느낄 수 있는지는 늘 막막하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 있는 대상을 찾는다. 어떤 산을 볼 때, 어떤 사람의 말에서, 어떤 음악, 빛, 계절의 흐름 속에서 “거기에도 그 신성이 있습니까?” “그곳에서 제가 당신을 기억해도 될까요?” 이것이 바로 아르주나의 질문이며, 이다음이 크리슈나가 그 질문에 응답하는 시간이다.





4. 나는 거기에도 있다.


— 모든 것 속의 신성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요청에 응답한다. 하지만 단순한 목록을 던지지 않는다. 그는 삶의 크고 작은 모든 현상 속에서 신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이야기한다.


“좋다.

내가 나 자신을 드러내는 신적인 현현에 대해 말해주겠다.

그러나 그 전부를 말하자면 끝이 없기 때문에,

중요한 몇 가지만 말해주겠다.” (10.19)


이 말은 암시한다.

“신의 실재는 제한되지 않으며,

우리는 그저 그 광휘의 일면만을 감지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말한다.


“나는 모든 존재의 중심에 있는 참나 아트만이다.

나는 시작이요, 중간이요, 끝이다.” (10.20)


이 선언 이후, 크리슈나는 신화, 자연, 인간, 사물, 감정, 개념에 이르기까지 세상 속의 거의 모든 영역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일부로서의 ‘신성한 현현’을 나열한다. 그럼 왜 이런 나열을 할까? 많은 독자가 이 대목에서 멈칫한다. 비슈누, 루드라, 아이라바타, 마카라… 무수한 고대 인도 신화 속 상징들은 현대인의 일상과 너무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크리슈나의 의도는 ‘이 모든 이름들을 외우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삶을 구성하는 모든 차원. 자연, 인간, 지혜, 권력, 감정, 정화, 침묵. 그 모든 곳에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높은 산과 가장 사나운 동물, 가장 섬세한 지혜와 가장 일상적인 소리 ‘옴’까지 “내가 그 안에 있다.”


“나는 태양의 빛이고, 달의 냉기이고,

비슈누이고, 바람이고, 갠지스강이다.

나는 제사의 불이고, 시인의 영감이고,

싸움의 용기이며, 진리의 말이다.” (10.21–36 요약)


이것은 종교적 신격의 열거가 아니라, 삶 속의 아름다움, 힘, 질서, 지혜, 움직임. 그 모든 ‘탁월함’ 속에 깃든 생명성을 가리키는 언어다. 바가바드 기타는 지금 “신은 저 높은 곳이 아니라, 당신이 매일 마주하는 가장 강렬한 감각 속에 있다”라고 말한다.


“나는 사기꾼들의 도박이기도 하다.” (10.36)


이 문장은 특히 충격적이다. ‘신이 왜 도박처럼 모호하고 속이는 일에 현현하는가?’ 하지만 이 말은 이렇게도 들릴 수 있다. “나를 빛나는 것 속에서만 찾지 마라. 세상의 모호함, 미혹, 어두움, 역설 속에서도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신성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 존재의 모든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는 근본 원리인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말은 한 문장으로 모인다.


“나의 파편 하나로

온 우주가 가득 차 있다.” (10.42)


우리는 그 전체를 알 수 없지만,

그 파편 하나가 우리 삶에 깃들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5. 하나에서 모두로, 모두에서 하나로


— 그 깨달음 하나면 충분하다.

끝없는 나열 끝에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 신적인 현현은 끝이 없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10.40–42 요약)


지금까지 장황하게 이어졌던 수많은 형상과 이름의 향연, 그 모든 열거의 결론은 오히려 비움과 단순성이다. “나의 파편 하나만으로도 온 우주는 가득 차 있다.” 이 말은, 더 많이 외우고, 더 많이 이해해야 깨닫는 것이 아니다.라는 크리슈나의 마지막 요가적 선언이다.


이제 바가바드 기타는 읽는 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신의 이름을 아는가?”가 아니라, “당신은 지금 무엇 안에서 신성을 보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물건, 사람, 풍경, 느낌, 태도일 수도 있다. 그 속에서 “이것은 단지 이것 이상이다”라는 감각을 느꼈다면, 그때 우리는 이미 그 하나의 파편 안에서 전체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침묵과 체험의 자리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제 그대는 안다.

신은 밖에 있지 않고,

가장 일상의 순간에 깃들어 있다.”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곳,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순간,

우리의 침묵이 빛나는 자리에

신성은 이미 거기, 조용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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