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혼돈 속으로 나를 던지는 일도 필요해
“여행 가자~!”
“오사카로!!!”
뜬금없이 누나에게 메시지가 왔다. 누나는 여행 특가가 뜨거나, 어떤 계기로 여행 갈 생각이 들면 이렇듯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평소 여행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지갑 상황이 해외여행을 다녀올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생각 좀 해볼게.”
“생각은 무슨 생각.”
“여행 경비 내가 낼 테니까. 그냥 가자!”
“이럴 때 아니면 나중에 갈 시간도 없어!”
나이가 들며 깨달은 건 친구든 가족이든 갈수록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는 거다. 그래서 지금이 아니면 시간 없다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2년 전 누나는 같은 회사 직원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지금 신혼이었다. 몇 년 안에 아이가 생긴다고 가정하면 남매끼리 가는 해외여행은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 기회였다. 평소 무슨 일이든 단번에 결정하는 법이 없는데, 누나의 설득에 오늘만큼은 빠른 결정을 내렸다.
“그래, 가보지, 뭐.”
오사카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여행을 고민한 시간보다, 오사카로 날아온 시간이 더 짧은 듯했다. 일본 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고등학생 때 후쿠오카로 3박 4일을 다녀왔고, 그 후 10여 년 만에 일본에 다시 온 거였다.
오사카는 처음이지만, 이곳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친숙했다. 도심을 걷다 보니 서울인 것 같기도 하고, 부산인 것 같기도 했다. 날씨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너무 춥거나 덥지 않고 푸근했다.
누나는 대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했다. 그리고 일본 돗토리에서 2년 유학까지 해서 일본어가 능숙했다. 그에 비해 내 일본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고등학교 때 교과과정으로 잠시 배우긴 했으나, 다 잊은 지 오래였다. 한국에 비해 오사카는 외국어가 적힌 간판 수가 적었다. 영어라도 적혀있으면, 읽는 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주변 간판이나 종이에는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만 보였다. 그래서 공항에서부터 줄곧 입을 꾹 닫은 채, 누나만 졸졸 따라다녔다.
첫날부터 일정이 많았다. 긴장한 탓에 체력 소비가 컸는지 조금 버겁긴 했지만, 투정 부리진 않았다. 여기서 투정까지 부린다면 너무 염치없으니까. 그래도 너무 힘들다 싶을 때는 지친 내색을 비췄다. 그러면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가지 일정을 취소했다. 휴식을 위해 들어간 카페에서 지친 다리를 쭉 폈다. 반나절 만에 이미 만 보 이상을 걸은 상태였다. 달콤한 음료와 케이크를 먹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생경한 장소에서 누군가의 일상을 보는 일도 여행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두 번째 날에는 벚꽃을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어 본 누나의 표정도 덩달아 날씨처럼 흐려졌다. 다행스럽게 빗줄기가 그리 굵지 않아서 우리는 투명한 우산을 쓰고 벚꽃 사진을 남겼다. 밝은 분홍이 짙은 분홍으로 변하긴 했지만, 사진에 남을 벚꽃 색이 그리 중요하진 않았다. 비 오는 날의 오사카도 나름 좋았으니까.
저녁에는 온천을 갔다. 우리 남매는 온천을 좋아했다. 남녀가 분리되어 있어 각자 온천을 즐기고 3시간 뒤에 만나기로 했다. 온천 내부는 우리나라 목욕탕 정도로 생각보다 크진 않았다. 비누 거품으로 몸을 닦고, 야외로 나갔다. 바깥의 서늘한 공기와 온천의 열기가 만나 뿌연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여러 종류의 탕 중에서 물 높이가 허벅지 정도 되는 얕은 탕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누웠을 때 몸이 반쯤 잠기고, 얼굴은 바깥으로 드러나 있어 시원하면서 동시에 따듯했다.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탕에 누워 멍하니 검은 하늘을 바라봤다. 시원한 빗줄기가 얼굴을 두드렸고, 빗방울의 마찰음이 기분 좋은 소음을 만들었다. 온천 근처에는 우리가 내린 공항이 있었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비행기의 이착륙 소리도 편안함에 한몫을 더했다. 눈을 꼭 감으니, 낮에 본 벚꽃이 떠올랐다. 누나는 제대로 즐기지 못한 벚꽃을 아쉬워했지만, 나는 하나를 내어주고 다른 하나를 받은 것 같았다. 화창한 날의 벚꽃과 비 내리는 온천을 맞바꾼 셈이었다.
어느새 비가 더 굵어져 빗방울이 수면 위로 톡톡 튀었다. 몸을 일으켜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시계를 봤다. 흐릿한 시야로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으로 약속한 시각이 거의 다 왔음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5분만 더 머물자는 생각으로 몸을 다시 탕에 담갔다. 때마침 하늘로 이륙하는 비행기의 붉은빛이 보였다. 하나의 빛에 담긴 수많은 설렘이 느껴졌다. 나는 그 불빛 속에 있는 사람들이 좋은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