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을까?
가끔 주변 사람들과 철학적인 소재로 이야기를 나눈다. 최근에 기억에 남는 주제는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로 바뀔 수 있는가?”였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다수의 사람이 인간의 의지에 한 표씩을 던졌다. 단, 나만 제외하고. 나는 줄곧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운명은 인간의 의지로 거역할 수 없는 성역이라 여겼다.
가끔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마치 키가 닿지 않는 곳으로 올라간 배드민턴 공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리 뛰어도 닿지 않는다. 땀 흘리며 전력으로 뜀박질을 해도 결코 닿지 않는 곳에 있다. 닿지 않는 배드민턴공이 내겐 운명 같았다.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저 거대한 흐름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생각하는 운명은 약간 이런 식이다. 결과는 정해져 있으나, 그 과정은 자유롭다. 예를 들어 한 사람과 사랑에 빠져 결혼할 운명이라면. 둘이 만나고 헤어지고, 반복하다가 결국 어느 순간에 만나 결혼을 할 거다. 다만 만나고 헤어지는 그 과정은, 운명으로 딱 정해져 있진 않고 인간의 의지로 변할 수 있다.
운명이 정해져 있고, 인간의 의지가 아무런 변화를 이끌 수 없다면 허탈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의도는 그게 아니다. 화가 박서보선생님의 다큐를 보다가 인상 깊은 말을 들었다. “작품은 예술과정에서 나오는 찌꺼기에 불과하다. ” 운명도 그렇지 않을까? 비록 운명이라는 결괏값은 바꿀 수 없지만, 운명을 향해 가는 과정은 우리가 관여할 수 있고, 변할 수 있다. 박서보 선생님의 비유를 운명에 빗대어 보자면 내게 운명은 삶의 과정에서 나오는 찌꺼기에 불과했다.
어제 영화를 한 편 봤다. 여러 사람이 모여 목숨을 건 게임을 하는 영화였다. 그 영화를 보면서 운명에 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정해진 운명을 수용하지 않고, 처절하게 벗어나려는 한 인간의 발버둥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의지를 너무 얕본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면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마주했을 때, 아마도 겸허히 받아들였을 거다. 그에 반해 주인공은 끝까지 주어진 운명에 저항했다. 그건 운명은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문득,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자와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자 그 둘이 보여줄 최선의 정도가 다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많은 상황에서 이 또한 운명이겠지 하면서 멈춘 적이 많았다. “열심히 했잖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라며 합리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떠올려보니, 그때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마음으로 더 처절하게 발버둥 쳤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운명을 겸허히 수용하는 순간도 필요하지만, 때론 강렬히 저항하는 순간도 분명 필요하다고 느꼈다. 인간의 의지가 모든 걸 바꿀 수는 없지만, 때론 바꿀 수 있는 것이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