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장벽, 그 ‘휑함’이 남긴 질문

1997년 봄, 베를린에서 마주한 통일의 실체

by 태국학연구소

1997년의 기록: 아우토반, 미테의 낙서, 장벽의 빈터, 그리고 선술집


1. 지평선 위의 의아함: 아무것도 없던 그 길

1997년 봄,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베를린으로 향하던 아우토반 위에서 나는 낯선 황량함을 마주했다. 통일된 지 7년이 지났건만, 구동독 지역의 도로는 지평선 끝까지 휑하기만 했다. 서독의 질서 정연한 풍경 대신, 무채색의 대지와 낮은 구름만이 차창을 스쳤다. "과연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의아함이 밀려올 때쯤, 나는 베를린의 경계에 닿았다.

나에게 1997년의 베를린은 '글'이 아니라 '이미지'였다. 그곳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가졌는지, 내가 딛고 선 땅이 얼마나 거창한 비극의 현장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핸들을 잡고 마주한 낯선 풍경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2. 예고 없는 환영식: 인파와 낙서의 도시

도시 입구는 아우토반의 정적과는 정반대였다. 기억속의 차량행렬은 끝을 알 수 없었고 지독한 병목 현상에 조금씩 짜증이 날때쯤, 시내를 가득 채운 인파가 나를 덮쳤다. 이유도 모른 채 갇혀있던 그 길 끝에서 만난 베를린은 거대한 '공사장'이자 '전시장'이었다.

낡은 건물의 벽면을 빈틈없이 채운 형형색색의 그라피티(Graffiti)들은 '여기는 이제 막 다시 태어나는 중'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내겐 무법과 자유가 뒤섞인 묘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도 저기도 솟아 있는 크레인이 하늘을 수놓은 풍경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심장 수술을 받는 듯한 생경함 마저 안겨주었다. 지인이 내어 준 공간이 없었다면 그 거칠고 유쾌한 낙서 아래에서 노숙을 해야 했을지도 모를, 그토록 뜨겁고 어수선한 입성이었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풍경 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고, 오로지 이미지로만 그날의 베를린을 기억한다.



3. "이게 뭐지?": 장벽, 그 허무한 진실 앞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순간은 무너진 장벽 앞에 섰을 때였다. 역사적 드라마의 엄숙함과 비장함을 기대했던 걸까,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저 뭔가 만들다만, 혹은 정리하다만 공터일뿐이었다. 그나마 그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그래피티들이 황량함을 메워주고 있었다. 그 순간 뜬금없이 나는 참 쓸쓸했다.

그러나 내가 계속 보아 온 베를린 입구부터 시작하여 도시 곳곳의 수많은 그림과 낙서들은 오늘날 베를린을 '스트릿 아트의 성지'로 만든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통일 직후 동베를린 지역은 건물 주인이 불분명하거나 비어있는 집들이 많았고 그 낡은 벽들은 전 세계 예술가와 젊은이들에게 '자유의 도화지'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미테(Mitte) 지역의 낡은 건물들은 예술가들이 점거하여 거대한 그라피티로 뒤덮였다고 한다. 1997년은 이 에너지가 가장 강렬했던 시기로, 깨끗한 벽보다 낙서된 벽을 찾는 게 더 쉬울 정도였다. 나에게는 '지저분함'보다는 '정리되지 않은 자유'로 다가왔던 것 같다. 기억 속에는 베를린이라면 낙서와 그림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니까.


말하지 않았으면 모를뻔한 Checkpoint Charlie를 지나치며 "이것이 정말 세상을 반으로 갈랐던 장벽의 흔적인가?"라는 허무한 질문이 입안을 맴돌았다. 화려한 안내판이나 세련된 건물 대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도시 외곽에서나 볼 법한 낮고 낡은 건물들이었다. 장벽이 사라진 자리를 메우기 위해 숲을 이룬 노란 크레인들과 철골 구조물들. 현재 우리가 보는 그 깨끗한 하얀 초소는 당시 그 자리에 없었다. 텅 빈 교차로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표지판만이 이곳이 세계를 반으로 갈랐던 칼날의 자리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물리적인 벽을 허무는 것은 축제였으나, 그 빈 공간을 채우고 무너진 체제를 다시 잇는 것은 지독하게 지루하고 무거운 ‘현실의 책임’이라는 것을 그 휑한 빈자리를 보며 깨달았다.

38선을 등 뒤에 둔 이방인에게 베를린의 그 초라한 흔적은 "과연 우리는 저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묵직한 숙제를 던져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긴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베를린 시는 장벽의 물리적 실체가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며, 장벽이 지나던 자리에 구리판(Berliner Mauer 1961-1989)과 함께 특유의 보도블록 선을 깔기 시작했다고한다. 1997년은 이 흔적들이 막 베를린의 바닥 곳곳을 관통하며 도시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던 때였다는데 나는 전혀 기억에 없다.


4. 1일 1맥주와 유쾌한 사람들: 사람의 온기

그 무거운 사유 속에서도 나를 버티게 한 것은 사람들의 온도였다. 소시지는 조금 짰지만, 푹 익힌 양배추 볶음(사우어크라우트)과 곁들인 돼지고기 요리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평소 맥주를 즐기지 않던 내가 그 시절만큼은 매일 맥주잔을 기울였던 건, 아마도 독일인답지 않게 유쾌하고 부드러웠던 그곳의 분위기 탓이었으리라. 그들은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서 이방인을 환대하며, 새로운 시대를 향해 조심스럽게 웃고 있었다.



5. 에필로그: 30년 만에 부치는 답장

그날 이후 나는 오랫동안 장벽에 대해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통일을 말하기에 그 짐이 너무나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때 느꼈던 당혹감은 사실 역사의 뒷모습을 가장 정직하게 마주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경외감이었다는 것을.

이제 나는 다시 베를린행 비행기를 꿈꾼다. 그때는 미처 하지 못했던 '계산'과 '셈'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그 사우어크라우트의 맛을 느끼고 싶다. 비행기를 타기 전 국제 정세가 조금은 더 평온해지길, 그리하여 29년 전 그 휑한 도로 위에서 시작된 나의 여정이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1997년 4월, 이름 모를 건물들과 흙먼지 날리는 공사장 사이에서 느꼈던 그 당혹스러운 '휑함'은 이제 3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으면 몰랐을 그곳의 진실을 이제는 나의 발걸음으로 직접 확인하러 갈 예정이다.


2027년의 베를린은 1997년에 보았던 그 수많은 크레인들이 지어 올린 현대적인 풍경들로 가득하겠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날의 적막했던 린덴슈트라세와 초소조차 사라졌던 체크포인트 찰리의 풍경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워라~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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