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프라깨우 벽화로 본 라마 1세의 얼굴

나는 왕이어야 한다.

by 태국학연구소

방콕 왕궁의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그림은 묻지 않는다.

대신 계속해서 보여준다.

싸우는 장면, 떠나는 장면, 기다리는 장면, 그리고 돌아오지 못하는 장면들.

라마끼안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없다.

벽화는 늘 침묵한다.

그러나 이 침묵은 공백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 그림들 속에서 “왜 하필 라마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태국은 불교 국가다.

왕궁의 가장 중요한 사원에, 부처의 생애가 아니라 힌두 서사의 영웅을 가득 그려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라마는 신이지만, 동시에 인간이다.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불교적 세계관 안에 있다.

그는 윤회를 끝낸 존재가 아니라, 윤회 속에서 선택을 반복하는 존재다.

싸우고, 분노하고, 실수하고, 그 결과를 감당한다.

이 점에서 라마는 깨달은 존재라기보다는, 끝까지 역할을 떠맡은 존재에 가깝다.

왓프라깨우의 벽화는 바로 이 점을 집요하게 반복한다.

라마의 고난은 미화되지 않고, 전쟁은 낭만화되지 않는다.

승리는 곧바로 안도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왕이 된다는 것은, 질서를 회복한 이후에도 책임이 남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림은 계속 상기시킨다.


이 벽화가 만들어진 시점을 떠올리면, 그림의 얼굴이 조금 달리 보인다.

아유타야가 무너지고, 왕조가 끊어지고, 나라의 중심이 다시 세워져야 했던 시기.

라마 1세는 스스로를 “새로운 시작”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창시자로 과시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된 이야기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나는 처음이 아니다.”

“나는 선택된 자라기보다, 이어받은 자다.”


라마라는 이름은 그래서 중요하다.

비슈누의 화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질서가 무너질 때마다 다시 호출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완전하지 않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존재.

스스로 물러날 수 없기에,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하는 존재.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 선택은 묘하게 긴장된다.


석가모니 부처는 왕의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라마는 떠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윤회를 벗어나는 길을 보여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윤회 안에서 권력을 감당하는 모습을 남겼다.


왓프라깨우의 벽화는 이 둘을 섞지 않는다.

대신 나란히 둔다.

부처는 사원 안에 있고,

라마는 회랑을 따라 끝없이 걷게 만든다.


이 배치는 질문을 만든다.


누군가는 떠나야 하고,

누군가는 남아야 한다면,

‘남음’은 누구의 몫인가.


이 질문은 과거의 왕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 이 질서 속에 서 있는 사람에게도 돌아온다.


왕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책임은 언제 끝나는가.



왓프라깨우의 벽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표정만 남긴다.

라마의 얼굴이다.

기쁨도, 승리의 환희도 아닌,

“그래도 내가 해야 한다”는 얼굴.

그래서 이 벽화는 왕을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왕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불편한지, 얼마나 무거운지를 조용히 반복한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익숙한 풍경을 떠올린다.


이야기는 신화이지만, 얼굴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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