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돌아 보라
나는 보라색을 좋아한다.
이 문장은 설명처럼 들리지만, 내게는 고백에 더 가깝다.
좋아한다는 말은 대개 이유를 요구받는다.
왜 하필 보라인가. 왜 분홍도, 파랑도 아닌가.
사람들은 언제나 그 ‘하필’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떤 색은 선택이라기보다 체질에 가깝다.
설명이 뒤따르기 전에 이미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들이 있다.
내게 보라는 그런 색이다.
태국에 처음 갔을 때, 나는 그 나라의 색채 감각이 낯설었다.
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노란빛이 공기 속에 가늘게 떠다니는 것 같았다.
왕실은 노란색으로 상징되고, 월요일이면 노란 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도시의 거리에는 국기와 함께 왕의 초상이 걸리고, 그 주변은 금빛 장식으로 번쩍거렸다.
마치 ‘노랑’이 하나의 계절처럼 태국을 덮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오래 머물자, 그 황금의 표면 아래에 또 다른 색의 체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태국은 단지 왕의 색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었다.
요일의 색으로 숨 쉬는 나라였다.
사람들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달력을 보지 않고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오늘 무슨 요일이야?”라는 질문이 곧 “오늘은 어떤 색이야?”라는 물음과 겹쳐 있다.
태국의 요일 체계는 점성술적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다.
하루하루는 시간의 단위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기운이 흐르는 통로로 이해된다.
월요일은 노랑, 화요일은 분홍, 수요일은 초록, 목요일은 주황,
금요일은 하늘색, 토요일은 보라, 일요일은 빨강.
태어난 요일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기질과 운세, 심지어는 인생의 흐름과 연결된다고 믿는다.
색은 취향이 아니라 운명의 기호가 된다.
나는 그 체계를 처음 들었을 때, 잠시 말을 잃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비밀이 뒤늦게 이름을 얻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토요일에 태어났다.
토요일의 색은 보라.
그리고 그 요일을 지배하는 행성은 토성, 태국어로는 프라싸오(พระเสาร์)라고 부른다.
토성은 무겁고 느리고, 멀리 도는 별이다.
서두르지 않는다.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점성술에서 토성은 시련과 인내, 구조와 책임을 상징한다.
선물보다는 과제를 먼저 내미는 별,
길을 내어주기보다는 우회로를 오래 돌게 만드는 별로 그려진다.
그런 토성이라는 존재가 지닌 상징적 무게에는 묘하게 설득된다.
한 바퀴 도는 데 거의 서른 해가 걸리는 별.
인간의 조급함과는 전혀 다른 시간의 단위로 움직이는 천체.
한 겹을 넘기는 데 몇 년씩 걸리는 두꺼운 책처럼, 이 별은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어쩌면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빠르게 성취하기보다는, 오래 맴돌며 이해하고,
같은 자리를 다시 지나가며, 천천히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예순이 되어서야 나는 조금 편안해졌다.
돌이켜보면, 토성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슷한 기간이었다.
우주가 한 바퀴를 허락하는 동안, 사람도 한 겹을 벗는다.
꼭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어도, 어딘가 다른 지점에 서 있게 된다.
나는 내 삶이 실패와 지연의 연속이라고만 생각하던 시기에서 조금씩 빠져나와,
‘늦게 도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깨달음은 의외로, 한 태국의 실크숍에서 찾아왔다.
태국의 어느 골목, 관리가 잘된 에어컨 바람이 밖의 열기를 단번에 차단하던 실크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자,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던
청보라, 홍보라, 남보라의 그라데이션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색은 선반을 따라 층을 이루고 있었고, 천의 결은 빛에 따라 미묘하게 흔들렸다.
손끝으로 스치는 실크의 촉감은 얇고도 단단했다.
실크 더미 사이사이에 난초 화분이 놓여 있었다.
오키드는 태국에서 특별한 꽃이 아니다.
길가 노점의 화분, 호텔 로비의 장식, 사원의 담장에도 무심히 걸려 있는,
그냥 어디에나 있는 꽃이다.
그러나 그 평범한 풍요 속에서 보라는 유난히 아무렇지도 않게 다뤄지고 있었다.
진한 보라의 난초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생활의 배경으로 물러나 있었다.
한국에서 보라는 때로 과장된 색이다.
행사용 현수막, 축제, 콘서트 응원봉, 특별한 날을 강조할 때 등장하는 색.
일상의 배경이라기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순간에만 허용되는 색처럼 다뤄진다.
그러나 태국에서 보라는 일상에 스며 있다.
승려의 가사와는 다른 계열이지만, 왕비의 상징색과도 닿아 있으면서,
동시에 시장의 천막과 실크 스카프, 싸구려 플라스틱 바구니에도 걸린다.
고귀함과 생활이 한 색 안에서 충돌하지 않는다.
성스러움과 평범함이 한 색 위에서 부딪히지 않고, 그저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점이 이상했고, 그래서 좋았다.
나는 한동안 그 실크숍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색의 결을 따라 손을 천천히 옮기며, 내가 왜 이 색에 오래 붙들려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보라는 파랑과 빨강의 경계에 서 있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동시에 들어 있다. 완전히 이성적이지도, 완전히 충동적이지도 않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중간지대와 닮아 있었다.
나는 늘 ‘사이’에 머무는 사람에 가까웠다.
믿음과 회의의 사이, 머무름과 떠남의 사이, 이해와 오해의 사이.
어느 한쪽으로 몸을 던지지 못하고, 경계선 위를 오래 서성이곤 했다.
파랑과 빨강 사이에 걸린 보라처럼,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안심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어느 쪽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상태.
그 어정쩡함이 오랫동안 내 결핍이라고만 생각되었다.
그런데 태국의 요일 색 체계 속에서,
토요일과 보라와 토성은 그 ‘사이’의 시간을, 하나의 리듬으로 승인해주는 것 같았다.
토성의 색이 왜 보라인지에 대한 답은 인도의 점성술과 연관이 있다.
토성의 신인 프라 싸오는 시바 신이 10마리의 호랑이를 가루 내어 보랏빛 천으로 감싸 탄생되었다 한다.
토요일은 프라 싸오의 날이며 고요함과 인내를 상징하는 보라색의 날이다.
하지만 토성의 신은 어둡고 엄정한 존재로도 그려진다.
시험하고, 기다리게 하고, 쉽게 풀어주지 않는 신.
어떤 약속이든 즉시 이행하지 않고, 충분히 늦춘 다음에야 허락하는 신.
보라는 그 무게를 품으면서도, 동시에 빛을 머금는다.
완전한 검정으로 가라앉지 않고, 끝내 색을 남긴다.
깊이 가라앉되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빛, 그것이 보라의 인상이다.
나는 내 인생을 빠르게 설명하지 못한다. 대신 오래 이야기할 수 있다.
돌아가는 길이 많았고, 다른 사람보다 늦게 이해한 것들도 있다.
남들은 한 번에 건너뛰는 단계를 나는 몇 번이고 되짚어야 했다.
그러나 그 느림 덕분에 놓치지 않은 것들도 있다.
스쳐 지나가는 표정 하나, 대수롭지 않게 말해진 문장 하나,
잊혀진 골목의 간판 하나를 나는 유난히 오래 기억한다.
토성이 느리게 공전하듯, 나 역시 조용히 궤도를 그렸다.
누군가에게는 답답해 보였을 그 궤도가, 이제는 내 고유한 속도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태국에서 배운 것은 언어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색이 세계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요일은 달력의 칸이 아니라 우주의 리듬이고, 사람은 그 리듬에 얹혀 움직인다.
색은 취향을 넘어 존재의 좌표가 된다.
‘무슨 요일에 태어났는지’라는 질문이
‘어떤 색의 시간을 타고 태어났는지’라는 물음으로 바뀌는 순간, 삶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나는 이제 보라를 단순히 ‘좋아하는 색’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속도이고, 나의 시간이다.
조금 늦게 시작하고, 천천히 무르익고, 오래 남는 시간.
한 번에 눈부시게 타올랐다 사라지는 불꽃이 아니라, 해가 기울고 난 뒤에도 한동안 남아 있는 여운 같은 것.
나는 그 여운의 길이를 나의 척도로 삼기로 했다.
토요일의 색은 화려하지 않다.
눈부시게 밝지도 않다.
대신 오래 간다.
해가 질 무렵 하늘에 남는 마지막 기운처럼, 빛과 어둠이 뒤섞인 채 서서히 스며든다.
하루의 끝과 밤의 시작이 맞닿는 시간,
무언가를 끝냈다는 확신도,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는 불안도 아닌,
그 사이의 호흡.
나는 그런 시간을 좋아한다.
그 애매함이야말로, 인간이 견디며 사는 대부분의 순간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궤도를 돌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빠르게, 누군가는 멀리 돌아서.
누군가는 눈부신 속도로 목표를 통과하고,
누군가는 같은 자리 주위를 오래 맴돌다가 비로소 방향을 튼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도착했는지가 아니라,
각자가 어떤 리듬을 택했는가, 혹은 어떤 리듬에 이끌렸는가일지도 모른다.
나는 토요일의 궤도를 택했다.
아니, 어쩌면 그 궤도가 나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실크의 결을 손끝으로 더듬던 그 날 이후, 나는 보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겁다는 이유로 피하지도 않는다.
토성의 별빛이 도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듯,
나의 말과 나의 삶도 늦게 닿을 것이다. 그러나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 바퀴는 오래 걸린다.
하지만 끝내 돌아온다.
그리고 나는, 그 리듬에 따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