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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사 Aug 20. 2024

저주와 선물 사이

나는 중독스펙트럼의 어디쯤 있을까?

원장님이 한 말입니다.


"남 일이 다 내 일이더라, 살아보니 남이 겪는 건 나도 다 겪게 되더라."


미용실에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돌아다니곤 합니다. 보통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만 원장님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속으로 맞아, 맞아라고 맞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맞는 말이어도 좋은 일이면 모를까 안 좋은 일은 내 일이 아니기를 바라게 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막상 예외일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보던 기막힌 일이 코앞에 닥쳤을 때 그것은 재앙 그 자체였습니다. 도박은 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지 내 세상과는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도박'이라는 단어는 제 사전에 없었으니까요. 도덕적 실패, 인격적 결함, 중독에 취약한 기질... 이러한 말의 홍수 속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말은 "죽을 때까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저주였습니다.


저주받은 삶이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을 찾아 헤맸습니다, 한줄기 빛이 되어줄 만한 말. 기도도 되지 않고 원망과 분노가 차오르는 걸 누그러뜨릴 만한 말.

닥치는 대로 흡입했습니다. 소화시키는 건 나중 문제였습니다. 일단 메모하고 베껴 쓰는 제가 '말을 잃은 사람'같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우연히 닥터 폴의 책 <나는 중독스펙트럼의 어디쯤 있을까?>를 만났습니다.



"나는 과거 알코올 중독자였다."


이 첫 문장 때문에 두툼하고 약물중독에 대한 내용이 많아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솔직한 고백에 이어지는 설명은 쉬웠습니다. 내 세상과 딴 세상, 중독과 중독 아닌 삶 사이에 '담'이 없었고 삶이 '통' 하나라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저주받는 삶에서 느껴보는 온기, 오랜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중독스펙트럼의 어딘가에 서 있다. 스펙트럼의 위치를 옮기거나 중독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고 건강을 증진시킬 힘이 우리 안에 있다."





닥터폴은 중독에 대한 잘못된 믿음 10가지도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저주에서 풀려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다음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중독은 중독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많은 이들이 중독을 행동장애, 살아가면서 겪는 스트레스에 적응하기 위해 습득된 결과라고 본다. 나는 여기에서 심리적, 정신적, 사회적 측면이 의학적 측면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독은 실제로 '공중보건의 위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사회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실패했다는 징후이다."


거의 모든 책에서 중독이 의지박약의 문제가 아니지만 중독에 취약한 기질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맞지만 겉은 멀쩡하니까 '왜 저럴까'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병에 걸리고 싶어서 병에 걸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닥터폴의 말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자극추구적이고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생활습관의 변화가 중독자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중독을 극복할 수 있는 핵심이라고 합니다.


"생활습관을 바꾼 다음 그걸 완벽하게 지켜나갈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중독 스펙트럼 중증에서 중등도 위치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게 가치가 있을까? 당연히 가치가 있다."


그는 식생활 개선, 운동량 증가, 스트레스 감소, 자연적이고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것, 이와 같은 비의료적 개입이 중독치료에 결정적이라고 합니다.


몸은 정직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만 해도 삶의 질은 좋아집니다. 나가 살며 빚에 쪼들리는 아들은 불규칙한 식사, 운동부족, 우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만 봐도 현재 중독스펙트럼 어디쯤에 있는지 가늠이 되지만 삐져나오는 잔소리를 누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으로 생각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엄마가 자원봉사 갈까?" 여기서 말하는 자원봉사는 아들이 사는 원룸 청소를 해주는 것인데, 이제는 아들이 알아서 청소하고 인증샷을 보냅니다. 오지 말라는 뜻을 이렇게 하는 영리한 아들입니다.


"집밥 먹으러 올래?" 대충 때우는 식사 말고 제대로 된 밥을 먹이는 일, 저는 이게 이렇게 중요한 일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오늘 뭐 해, 시간 나면 엄마랑 좀 걸을까?"엄마가 걷기를 추앙하는 걸 알고 아들도 걷는 것을 좋아해서 종종 나무가 사는 곳으로 찾아가곤 합니다.

소장도서


"중독은 저주인 동시에 선물이다. 저주라는 건 명백하다. 하지만 중독이 주는 선물은 우리가 회복의 여정을 제대로 따라가기 전까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닥터폴의 말이 솔직히 실감 나지 않지만 품고 가보려고 합니다. 과연 중독이 주는 선물이 어떤 것인지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한마디 '말'을 찾아 헤맨 것이 병든 부모의 '약'을 구하려고 악전고투하는 민담 속 효자의 간절함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도박병의 '치료약'을 구해 아들손에 쥐어주려고 몸부림치는 동안 제 사전에 새로운 '말이 추가되었습니다. 도박, 도박중독,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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