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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사 Aug 27. 2024

의심과 배신감 사이

도박의 또 다른 이름, 거짓말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으세요?  **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500만 원만 빌려달라는데, 자매님이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네, 제가 알아볼게요. 알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다 하다 정말, 대부님한테까지 돈을 빌리려고 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친구가 사고를 당해서 어쩌고 저쩌고라고 했다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이게 도박중독자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증상이라니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돈을 빌려주기 전에 제게 알려준 대부님이 눈물 나게 고마웠습니다. 화가 가라앉자 이제 도박사실을 지인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거짓말, 지긋지긋합니다. 정말 강적입니다.



자기가 번 돈 중에서 여유돈으로 합법 도박을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중독스펙트럼 중증으로 갈수록 '써도 되는 돈'을 넘어서 '쓰면 안 되는 돈'까지 탈탈 털고 그것도 모자라면 남에게 빌려서까지 합니다. 그 지경에 이르면 밥먹듯이 하는 거짓말로 관계가 깨지는 것은 물론 일상마저 붕괴니다.


나무가 뿌리를 길게 뻗어 영양분을 섭취하듯 도박을 하기 위해 지인을 총동원해서(한 번만 본 사람조차까지 총동원) 자금을 끌어들입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정말 대단하다.' '어쩜 머리가 저렇게 돌아갈까.'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4. 종종 도박에 집착함(예/ 과거의 도박 경험을 되새기고, 다음 도박의 승산을 예견해 보거나 계획하고, 도박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생각)

6. 도박으로 돈을 잃은 후, 흔히 만회하기 위해 다음날 다시 도박함(손실을 쫓아감)

7. 도박에 관여된 정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함

9. 도박으로 야기된 절망적인 경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돈 조달을 남에게 의존함


DSM-5(정신질환의 진 및 통계 편람) 도박장애 진단기준 9개 중에 위의 4가지를 보면 도박중독이 곧 거짓말이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보통 사람들도 적당한 거짓말을 많이들 하고 삽니다. 그런데 도박중독자의 거짓말은 일반적인 경우와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위안인지 정신이 바짝 듭니다. 막상 당하면 가족들은 배심감에 시달리고 불신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거짓말하는 당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피하고 보자는 회피심리로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덧대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정작 피해야 할 것은 도박임에도 불구하고.


도박중독이 '돈'의 문제는 아니지만 '돈'과 밀접하기 때문에 '돈관리'가 필요합니다. 돈이 없으면 도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도박중독자 수중에 돈이 없게끔 하는 관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이어트를 위해 식단관리를 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지만 막상 해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0년 전에도 재정상담사의 조언으로 돈관리를 맡아보았지만 유야무야 된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돈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얼마얼마 보내라고 하면 업무 중에 짜증이 나고 방해되어 제가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중독 스펙트럼 경중을 오가는 동안  터득한 방법으로 지저분하고 복잡 통장은 다 없애고 입출금 통장 하나 남겼습니다. 월급 들어오는 즉시 전액 제 계좌로 송금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돈은 카카오페이로 보내고 입출금 내역이 생길 때마다 영수증, 인증샷으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가계부를 쓰지 않았던 어느 날, 자신의 빚이 어디로 얼마 나가고 얼마가 남았는지 모르는 걸 보고 이건 아니지 싶었습니다. 관리하는 사람만 알고 정작 주인은 모르는 황당함, 아들게 앞으로 직접 가계부를 쓰라고 했습니다.


적은 월급으로 근근이 살아도 괜찮습니다, 도박만 하지 않으면. 숨기고 모면할 것이 많으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으니 최대한 투명해야 하고요. 다 큰 성인 남자, 아들에 대해 감시하고 관리하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귀찮음을 무릅쓰게 하는 건 오로지 회복에 대한 간절함 때문입니다.


수중에 돈이 없으 단도박 하기 쉬워지고 밥먹듯이 하던 거짓말도 줄어드니 정상인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짓말과 거짓된 행동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보이기까지 합니다. 거짓말하는 본인도 괴롭지 않았을까,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는 모릅니다, 거짓말에 묶인 답답함도 풀리고 난 자유로움도. 단지 아들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으로 짐작만 할 뿐입니다.







"엄마가 택배로 보낸 유산균 잘 먹고 있니?"


"네, 참 좋더라고요. 고마워요."


우연히 아들 원룸에 들렀다가 뜯지도 않은 택배상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뿔싸, 한 달 전에 보낸 유산균 택배였습니다. 아, 거짓말.... 아들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그냥 그렇게 말했던 거라고 합니다.


아, 이런 증상이 당연한 거였는데 제가 깜빡 잊고 있었던 겁니다. 습관이 되어버린 거짓말. 엄마가 널 믿을 수 없는 게 가장 힘들고 슬픈 부분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제 웬만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다가 실제로 발등이 찍힌 것처럼 아팠습니다.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다 나은 게 아니었구나. 그래도 거짓말하는 것을 쑥스럽 여기고 미안하다고 말해주는 것만 해도 다행, 천만다행니다.





거짓말할 때마다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니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지긋지긋한 거짓말은 차치하고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의심과 배신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최대한 가급적 거짓말과 거짓행동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다독일 뿐 지독한 거짓말의 후유증 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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