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에 누워있었을 때
내 나이는 26살이었다.
내 양팔에는 각종 링거 주사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오른팔에 5개, 왼팔에 5개 있다.
콧구멍에는 산소호흡기가 꽂혀있다.
또 기저귀와 소변줄을 차고 있다.
주변을 보니 목구멍에 호스를 꽂아서
식사하는 환자들이 많다.
나는 직접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먹을 순 있었다.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들은 당장 몇 시간 뒤에도
생사를 알 수 없다.
나를 담당하는 간호사는 매일 바뀌었다.
2~3명의 남자 간호사가 보인다.
중환자실에 있는 간호사들의 주 업무 중 하나는
환자들의 대소변 기저귀를
수시로 갈아주는 일이다.
어느 날 아침, ‘오늘은 남자 간호사가
내 기저귀를 갈아주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했다.
이때 내 앞에는 나보다 어린
간호 실습생 친구들이 서 있었다.
회진 온 의사 선생님 말씀을 옆에서
열심히 들으며 수첩에 필기했다.
간호사님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배우고 따라 했다.
나는 실험실의 생쥐 같았다.
내 몸에 붙어있는 주삿바늘들 때문에
오른쪽으로 살짝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오로지 천장만 바라보면서 누워있는 게 전부였다.
숨쉬기, 먹기, 마시기, 걷기, 싸기 등
인간으로서 아주 기본적인 행위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이 박탈되었다는 현실에
수치심과 비참함을 느꼈다.
내가 생사의 갈림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을 때
동시에 내 앞에 있던 간호 실습생 친구들은
꿈과 목표를 실현하는 삶,
즉 인간으로서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의 잠재성에 따라 자기만의 꿈을 꿈꾸며
살 수 있는 인생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꿈을 갖고 산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당당하게 표현하며
가장 자기답게 사는 일과 같다.
똑같이 인간으로 태어나 유한한 삶을 살지만
꿈이 있는 사람의 삶은 특별한 품위가 있다.
설사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꿈이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만의 꿈을 가슴에 품고서
죽은 시간을 설레는 시간으로,
건조한 마음을 충만한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은 본연의 ‘나’로 돌아가는 기적이며.
언젠가 한 줌의 재가 되더라도
영원한 ‘나’로 무한히 빛나게 해주는 마법이다.
이것이 우리가 꿈을 꾸는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열매다.
최진석 저자는 책<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내가 한 인간으로 잘 살고 있는지,
독립적 주체로 제대로 서 있는지,
누군가의 대행자가 아니라 ‘나’로 살고 있는지,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는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높이에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면 된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껍데기일 뿐이다. ]
내가 진정 바라는 꿈은 무엇인지
자신에게 묻는다.
그 꿈이 나에게 주는 떨림을 마음으로 느껴본다.
또 내 삶에 어떤 울림으로 되돌아올지 상상한다.
*참고로, 남자 간호사가 날 담당할 차례가 오면 나를 배려해서 일부러 여자 간호사로
미리 바꿔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