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탓이 아니야
포르투갈 아조레스 제도 여행
2019년 3월 25일 ~ 4월 11일
플로레스 섬(Flores Island) 3일 차
2019년 4월 6일 토요일
어제는 플로레스 섬 투어를 마쳤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코르보 섬(코르부 섬, Corvo Island)을
다녀오기로 한 날이다.
플로레스 섬에서 코르보 섬으로 향하는 바닷길에서
돌고래 떼가 신나게 헤엄치는 장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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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를 보는 투어가 아니다.
섬 이동 중에 만난 돌고래 떼이다.
코르보 섬 꼭대기의 칼데이라 곳곳을
두 발로 누빌 수 있다는 사실,
극사실주의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장엄한 자연이 느껴지는 구글 지도의 후기는
코르보 섬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켜
나를 이곳까지 오게 했다.
플로레스 섬에서 코르보 섬을 가는 방법으로
편도 15분~20분, 30유로의 항공편과
편도 40분~1시간, 10유로의 아틀란틱 라인의 페리가 있다.
혹은 왕복 35유로의 투어리스트 보트도 이용 가능하다.
*투어리스트 보트는 일정 인원 이상이 되어야만 운항한다.
나는 아틀란틱 페리를 선택했고,
이 시기에는 화요일, 토요일에만
배가 운항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토요일에
아틀란틱 페리를 탈 수 있도록 여정을 구상했다.
금요일에 플로레스 섬 투어를 이끌어 준 가이드에게
"나는 코르보 섬에 가고 싶어서 아조레스 제도에 왔어,
내일이면 드디어 코르보 섬에 가서 정말 설레어!"
라고 했더니
"혹시.. 너 토요일 날씨는 확인해봤니?
네가 타려고 하는 아리엘(Ariel)이
어떤 배인지는 알고 있는 거지?"하고 조심스레 물어온다.
싸-한 기분으로 다급히 배 사진과 날씨 예보를 확인했다.
그래도 아틀란틱 오션을 오가는 배인데
피쿠 섬에서 파이알 섬을 이동할 때처럼
당연히 카페리 정도는 되겠거니 짐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리엘(Ariel)은 선원 2명 포함
정원 12인승의 통통배인 것이다.
플로레스 섬과 코르부 섬은
제주의 성산항과 우도 정도의 거리인데,
왜 40분씩이나 걸리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날씨 예보 또한 심상치 않았다.
가이드는 내일 배가 출항할 수 있는지 확인해 주겠다며
이리저리 전화를 돌렸다.
높은 파도 때문에
아틀란틱 라인의 페리와 투어리스트용 보트
모두 결항이라고 한다.
결항 소식에 온갖 상념이 올라오며
나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금요일 투어를 할 때만 해도 이렇게나 맑은 하늘 아래에
바로 눈 앞에 있어 쉽게 닿을 듯한 코르보 섬이었는데...
코르보 섬에 가기를 정말로 바랬다고는 하지만,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한 준비는 충분했던가?
섬 지역 특성을 감안한 날씨 변수를 고려했었다면
플로레스 섬 일정을 조금 더 여유롭게 구상했었어야지,
겨우 3박을 하면서도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니...
포르투갈을 여행하며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기회비용 계산기도 저절로 돌아간다.
이 좋은 계절에
유럽의 메인랜드에도 갈만한 곳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왜 하필 여기를 오고 싶어 했을까.
다른 곳을 갔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리스본은 몇 번이고 다시 오겠지만
리스본에서 상 미구엘 섬까지,
상 미구엘 섬에서 중간 급유지를 거쳐 플로레스 섬까지,
플로레스 섬에서 코르부 섬까지 가는 여정을
언제 다시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아니, 다시 이곳에 오기로 마음을 먹을 날이 오기나 할까?
아조레스 제도에 온 제일 중요한 이유였던
코르부 섬을 눈앞에 두고 갈 수 없단 사실에
이 일정을 위해 써야 했던 시간, 비용, 노력들이
무의미한 것 같아 순식간에 허망했다.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을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선택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에 스스로가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갈 수 없는 코르보 섬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원망하는
무한루프 속에 있던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바라고 좋아서
이곳으로 오기까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건만
일이 잘못되자 곧바로 나에게 화살을 돌리는 나,
이 못된 고질병이 또 도졌구나.
꼭 이렇게 나를 벌줘야만 속이 풀리는건지.
좌절 앞에 안 그래도 마음이 힘들 나를
몰아붙이고 또 몰아붙여서 자조自嘲의 끝을 보게 한다.
이 마음의 습관은 서른 즈음에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게 주어진 상황과 남을 탓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했지만
내 책임이 아닌 상황에서조차
불필요한 책임을 무겁게 감당하며 스스로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
나에게 일어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내가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거나
내가 하지 않아도 되고 할 수 없는 일은 내려놓자.
그렇게 다짐하며
마음의 길을 새롭게 닦아나가기로 해 놓고
또 금새 잊었다.
잊었던 다짐을 떠올리니 오랜만에 마주한 이 난관이
내 마음을 단련시킬 기회로 다가왔다.
그래, 코르부 섬에 가거나 가지 않거나
나에게 힘을 주는 방식으로 마음길을 내어보자.
일어난 사실부터 하나씩 따져보기로 했다.
대서양 한가운데 외딴섬에 가고 싶은 내 마음이 문제인가?
> 나의 바람엔 잘못이 없다.
바람을 품은 마음은 그저 예쁘다.
파도가 높아서 출항을 못하는 것이 나의 잘못인가?
> 대자연의 움직임엔 내 의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이 대자연을 느끼기 위해 아조레스에 왔다.
아주 고맙게도 제대로 경험하고 있다.
내 잘못이 없음을 확인하고 내 탓을 그만두었다.
그러자 코르부 섬을 향한 나의 바람만 생각할 수 있었다.
일기 예보를 확인하니,
다음주 중반까지 파도가 잦아들 기미가 안 보인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예정대로 떠날것인가?
아니면 다음 섬을 위해 준비한
환불 불가 비행기 티켓과 숙박을 날리고
플로레스 섬에서 좀 더 기다려보겠는가?
혹시나 하고 항공권을 찾아보았다.
내일 일요일 비행기를 놓치면
다음 비행기는 화요일에 있다.
좌석은 한 자리가 남았다.
1시간마다 업데이트되는 날씨 예보에서
파도는 아주 미세하게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3미터를 웃돈다.
계획한대로 다음 섬으로 가야 할까,
플로레스 섬에 남아
설령 코르보 섬에 갈 수 없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었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며 이곳을 떠나는것이 더 나을까.
몇 번이고 마음이 왔다갔다했다.
고민의 시간을 보내다가
숙소 안주인 도나 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리기에 이른다.
도나 할머니는
코르보 섬에서 나고 자라기를 20여년,
플로레스 섬에 사는 남편을 따라
이곳으로 온지 40년 남짓 되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어만 쓰시기에 대화가 쉽지 않지만,
코르보 섬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내 고민을 나누고 싶었다.
도나 할머니는 하늘과 바다를 손으로 번갈아 가리키면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눈물 짓는 표정으로 배가 취소 되었다는 몸짓을 했다.
도나 할머니는 잠깐만 기다려보라는 손짓을 하고
휴대폰을 가져와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나를 바꿔주셨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반가운 영어가 들린다.
과연 나는 코르보 섬에 갈 수 있을까.
아조레스 제도 여행 Tip. 페리
아조레스 여행을 하게 될 분들을 위해
비행기, 페리 일정뿐만 아니라
날씨 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구구절절하게 나의 사례를 나누었다.
아조레스 군도를 다니는
Atlantico Line의 노선, 운항 스케줄 확인 및 예약은
아래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
*플로레스 섬~코르부 섬을 잇는 노선만 카페리가 안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