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이 기억하는 동거 첫날의 이야기
지훈 씨는 며칠 전에 다애를 데리고 병원에 방문해 주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계속 신경이 쓰인다. 도대체 내 마음은 무엇일까? 왜 이렇게 그 사람이 생각날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그때쯤이어서 내 슬펐던 기억이 그와 얽혀있는 것일까? 내가 다애를 버리려고 했던 일이 죄책감이 되어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일까?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은 눈을 한 그를 외면할 수 없나? 난 처음 느껴본 지금 내 감정의 이름을 알고 싶다. 난 내 맘을 더 알아줄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할 때쯤 그에게서 며칠째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바로 연락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지금 확인을 했어요. 제가 아직 밖에 나서는 게 쉽지가 않아서요. 혹시 저희 집에서 리브를 진찰해 주실 수 있나요? 그전에 리브를 봐주시던 수의사 선생님을 위해서 꾸며놓은 방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말고 저희 집으로 들어와서 봐주실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조건은 전부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난 문자를 보고 다시 한번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역시나 이것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마치 내 안에 숨겨진 보물 찾기를 하듯 그렇게 그는 나를 자극시킨다. “지금 이 문자의 뜻이 나보고 자기 집으로 들어와 살라는 말이야?” 아무리 읽어보아도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다짜고짜 동거를 하자는 말이었다. 정말 앞뒤가 없다. 아니면 나를 집에 상주시키는 전속 수의사쯤으로 여기나? "아..." 잘 읽어보니 다른 수의사도 그렇게 상주하며 관리를 해주었나 보다. 난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다른 분도 그렇게 해주셨다면 나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이 제안을 바로 거절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오로지 다애 때문이다. 맞다. 핑계가 아니다. 지금 다애의 나이로 봤을 때도 이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만약 내가 저 집에 들어가게 된다면, 어쩌면 나는 다애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 난 그 마지막을 미친 듯이 지키고 싶다. 난 항상 내가 사랑하는 것의 마지막을 지키고 싶다고 느낀다. 이것은 내 가장 큰 집착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생활 내내 매일같이 내 방 창문에 기대어 새벽을 산책하는 그와 다애를 지켜봐 왔다. 이제 나도 그들과 함께할 수 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래. 난 세상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가 아니다. 난 원하는 게 없었을 뿐이다. 이제 가지고 싶은 게 생긴 이상 그냥 가져야겠다. 난 결정을 하고 답장을 했다.
[네. 들어갈게요.]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니 모든 것은 일사천리였다. 난 간단하게 며칠 입을 옷과 필요한 몇 가지 물건을 챙겼다. 그렇게 그날 밤을 새웠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나는 수학여행을 가는 아이의 마음이 된 거 같았다. 밤새 잠들지 못하는 어둠으로 여전한 시간이 지나고 샛별이 뜨자,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하는 그들이 나타났다. 내일은 여기가 아닌 저기 저들과 함께하겠지?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난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마치 몇 달간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 이런 기분일까? 난 지훈 씨 집 앞에 섰을 때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집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은 들어가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상인 거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아버지 집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다. 아버지 집은 크고 비싸 보이기 위한 집이었다면, 그의 집은 애써 그 존재를 감추려는 듯 보였다.
대문의 인터폰을 누르고 얼마 후 지훈 씨가 꾸물거리며 나왔다. 날 보며 놀라는 눈을 기억한다. ‘본인이 오라고 해놓고 왜 이렇게 놀라지? 너무 아침에 왔나?’ 하긴 언제 들어간다는 시간을 정하지는 않았구나. 조금 쑥스러운 마음이 들자 애써 모른 척 지훈 씨를 지나서 집안으로 향했다. 집은 밖에서 봤을 때보다 더 넓어 보였다. 뭐랄까 오래된 고택 같았다. 집으로 이어지는 돌계단마저 기품 있어 보인다. 한참을 대문 앞에 서있던 지훈 씨를 뒤로하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다애가 나를 반긴다.
“이제 매일 볼 수 있겠다. 그렇지?” 다애를 마음껏 만지고 있는 중에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든다. 얼굴이 벌개 가지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지훈 씨가 보인다. 난 애써 못 본 척 말을 건넸다. “제방은 어디죠? 예전 선생님이 쓰시던 방 있으시다면서요.”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다애가 먼저 나를 이끈다. 집안은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거 같았다. 오래된 가구들이 꽤나 고급스러워 보인다. 다애가 이끄는 방문을 열자 지훈 씨가 허겁지겁 다가와 내 손목을 잡고 이끈다. '이 방이 아닌가?' 잠시 열린 방 안으로 들어간다. 방안은 자개로 만든 가구와 여러 미술도구들이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었다. “여기는 누구 방이에요?” 당황스러워하는 지훈 씨는 핸드폰을 들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할머니가 쓰시던 방이에요. 지금은 안 계세요.]
방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이방은 채광이 참 좋구나. 정겨운 향기가 나.' 다시 다애를 따라서 다음방으로 움직였고, 지훈 씨는 못 볼걸 감추려는 듯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마치 빵빵한 풍선 같았다. 한쪽을 움켜쥐면 다른 쪽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내 마음을 건드렸다. '너무 꽉 쥐면 터질까?' 난 잠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고 다음 방문을 열었다. 아마 이방은 손님용 방인 거 같았다. 호텔 같은 새하얀 침구와 최소한의 가구만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개별적으로 딸려있는 화장실도 보였다. “저 그냥 이 방으로 할게요. 괜찮죠? 조건은 다 맞춰주신다 했으니 제 요구사항은 곧 정리해서 말해줄게요.” 그는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고개를 아주 천천히 가로저었다. 정말 아주 천천히. 난 다시 지훈 씨를 지나쳐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섰다. 그러자 나를 따라오던 지훈 씨는 아주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 고개를 젓는 속도가 다르네?' 몸짓에도 감정이 있구나. 울 거 같은 그의 표정에 나는 시혜를 베풀듯 이야기했다. “이층은 안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뜻이죠?” 지훈 씨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애를 닮았다.’ 난 잠시 그의 미소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집구경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거실바닥에 앉아 다애와 놀아주었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다애가 죽기 전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내가 버림받은 그때에 내가 버렸던 다애를 찾는다면 구멍 난 내 마음도 조금은 치유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미 그 재생은 시작되고 있었다. 난 알 수 있다. 손끝부터 전해지는 이 따스한 감촉이 이미 말해주고 있으니까. "다행이야. 널 다시 만나서."
지훈 씨는 언젠가부턴가 내 얼굴을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현실적인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나의 선택은 내가 책임지면 그만이니까. “전 출근해야 해서 나가볼게요.” 짐을 내 방에 던져놓으며 말했다. 나를 배웅하는 다애와 노려보는 지훈 씨를 뒤로하고 대문을 나서려고 하자 그가 황급히 내 손에 무언가를 건넨다. "카드키를 주는 거예요?" 난 진짜 집주인에게 허락을 얻은 것 같았다. 이제 퇴근하면 나를 반겨줄 사람이 내 눈앞에 서있다. 난 조금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었다.
[ 10화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