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이 말하는 동거 첫날밤의 이야기
이른 아침 울리는 인터폰 소리에 나는 의아했다. 인터폰 속 화면에는 소희 씨가 서있었다. “왕진을 이 시간에 와주시는 건가? 사전에 조율이 안되었는데.” 일단 나가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난 문을 열어줘서는 안 되었다. 내가 그 문만 열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앞에서 마치 자기 집인 양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니는 이 참사를 막을 수 있었겠지? 리브는 신이 난 듯 그녀를 끌고 집안 여기저기를 탐험한다. ‘리브야 넌 그렇게 소희 씨가 좋니?’ 그녀는 마치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 결과가 오늘 이 순간이라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내가 미쳤나 보다.
내가 잠시 딴생각에 빠져있을 때 소희 씨는 할머니방의 문을 열고 있었다. 난 황급히 그녀를 따라서 방에 들어갔다. 들어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아직도 할머니의 온기가 방안에 그대로 남아있는 거 같다. 한쪽 구석에는 할머니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그리시던 그림이 이젤 위의 캔버스에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난 매일 이 그림을 보면서 그림의 완성본을 상상한다. 머리가 없는 두 남녀가 함께하는 그림이다. '두 사람은 무엇을 하는 걸까?' 할머니의 마지막 유작이 된 이 그림은 아직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다.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공개해야 하지만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
열린 커튼 사이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온다. 아침 시간의 이 공간은 알알이 결정화된 빛들이 방안을 가득 메운다. 마치 거대한 빛의 수족관에 들어온 듯 방안은 그 빛으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 빛을 모두 받아내는 소희 씨가 서있다. 이 공간에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이 방에 누군가가 함께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신기해하는 그녀를 바라본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나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산다. 그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행복해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다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소희 씨가 할머니방을 천천히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며 난 이기적 이게도 그녀를 잡고 싶어 졌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 어떤 치료도, 약도, 상담도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서있는 이방의 전경이 나에게 말한다. 난 사실 이기적인 사람이었다고.
내가 잠시 지난 십수 년 동안 멈춰있던 변화를 겪고 있는 중에 소희 씨는 어떻게 알았는지 손님방을 찾아내고는 방안의 침대에 앉아보며 만족해하는 거 같다. “저 그냥 이 방으로 할게요. 괜찮죠? 조건은 다 맞춰주신다 했으니 제 요구사항은 곧 정리해서 말해줄게요.” '응? 요구사항? 이미 난 오늘의 급격한 변화에 지쳐있었지만 무슨 요구가 더 쏟아질지 사뭇 걱정이 되어 웃음이 났다.'
"다행이야. 널 다시 만나서." 리브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소희 씨를 보고 있다. 어릴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이다. 모든 걸 삼킬듯한 칠흑 같은 머릿결에 깊은 눈동자는 잠시만 보고 있어도 영혼을 빼앗길 거 같다. 사실 리브는 소희 씨에게 돌려줘야 했다. 첫날만 지나면 난 리브를 소희 씨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첫날 난생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고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난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리브가 없으면 난 버틸 수 없을 거 같다고 믿었다. 그래서 리브를 소희 씨에게 돌려줄 수 없었다. 난 그대로 학교를 자퇴해 버렸다. 그렇게 소희 씨에게서 도망쳤다. 다시 공원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난 알고 있었다. 이제는 리브를 돌려줘야 한다는 걸. 다행히도 우리는 리브를 같이 돌볼 수 있게 되었으니 내 인생에 이런 행운이 더 이상 있을 수 있겠나.
“전 출근해야 해서 나가볼게요.” 난 출근하는 그녀를 붙잡고 내 결심을 건넸다. "카드키를 주는 거예요?" 카드키를 받아 드는 그녀의 눈에서 잠시 기쁨이 스친다. 나는 그녀의 기쁨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난 생각했다. 난 말할 수 없으니 모든 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난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고는 마음이 단단해졌다. ‘난 말할 수 없으니 행동으로 보여주면 된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씩 소희 씨에게 나를 보여주기로 했다.
저녁시간이 되기 전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물론 밥을 먹고 들어올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어떤 걸 좋아할지 모르니 무난하게 한식으로 준비한다. 퇴근하며 들어오는 소희 씨는 식탁을 보더니 말없이 앉는다. 밥을 먹는 소희 씨 표정이 무표정하다. 맛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난 혼자 먹던 식탁에 둘이 앉아 있는 이 상황이 어색하기보다는 신기하다. "뭐 잘 먹었어요. 한번 하면 계속해줘야 하는 거 알죠?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밥을 먹자마자 이 말을 내 가슴에 찔러 넣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식탁 아래서 기다리던 리브도 그녀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간다. 난 어이가 없어서 그 닫힌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오늘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난 이층에 있고 소희 씨는 일층에 있다. 사실 같은 공간이라고 보기도 민망하다. 하지만 묘하게 설렌다. 그녀가 함께하는 집은 공기의 무게부터 시작해 떠다니는 향기마저 다르다. "같은 지붕아래에 산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항상 곁에서 잠들던 리브를 오늘밤은 소희 씨에게 뺏겼지만 외롭지 않다. 그렇게 우리의 첫날밤은 깊어간다. 오늘의 이 순간이 꿈속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건 욕심인 걸까.
[ 11화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