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였던 그 시절에

by 은하수

버스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하늘은 잿빛으로 가득했다. 금방 비가 내릴 것 같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란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순간 나는 앞으로 맨 백팩을 무심히 열어보고는 3단 우산을 챙겨 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날씨는 비가 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물기를 걷어가곤 하니 마음속 품었던 염려는 바로 자취를 감췄다. 그때 익숙한 풍경이 눈으로 들어왔고, 내릴 때가 됐다는 생각에 빠르게 벨을 눌렀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찾아온다는 건 꽤 자잘한 생각의 과정들을 거쳐야 했다. 현재가 답답하게 느껴지니 마음을 깨끗이 비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이어,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을 밤에 이곳에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과 바람의 나열들을 지나오다 보니 어두워지면 집에 들어갈 생각부터 했던 내가 어느새 동네로 들어가는 언덕길까지 올라와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천리길 같았을 거리였겠지만 몇 발짝도 안 되는 발걸음에 나는 추억 앞으로 도착했다.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과거는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았었나 보다.


어둠이 내려앉은 이곳은 풀숲으로 우거진 공원으로 변해있었지만 나는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며 하나둘 기억을 쌓아 올렸다. 허름했던 아파트 사이를 뛰어다니며 신이 나게 놀러 다녔던 이름 모를 동네 아이들의 모습들, 그리고 아빠 몰래 엄마와 언니들과 갔었던 동네 치킨집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닭을 직접 자르고 튀김옷을 입혀 튀겨내며 순식간에 양념을 발라냈던 통닭집 아주머니의 모습이 선연했다. 양념치킨 위로는 통통한 땅콩 부스러기들이 맛깔스럽게 올라오곤 했고, 그 자리에서 한 입만 먹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따끈한 치킨의 온기가 흐르는 모퉁이를 돌아 예전 집이 자리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집 앞 야트막한 언덕 밑으로 자리한 놀이터에서 동네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았었던 정글짐, 신나게 그네를 타다 넘어져 세상이 떠나가도록 서글프게 울었던 순간들이 눈앞에서 또렷하게 펼쳐졌다. 그때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 우리 집 강아지 몽실이도 그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김장하는 날이면 어디선가 몰래 나타나 절임 배추를 훔쳐먹다 도망갔었던 강아지 몽실이. 동네 어른들이 모여 옆집 마루 위에서 맛있는 안주들과 술이라도 한잔 하는 날이면 정화조 윗 뚜껑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던 녀석의 동그랗던 두 눈, 그때 왜 그렇게 자주 한숨을 쉬고 서글픈 표정이었는지 물어볼 걸 하는 생각도 든다. 설마 몇 년 후에 우리가 헤어질 걸 넌 알고 그런 얼굴을 했던 거니? 하고 말이다.


혼자 힘으로 자전거를 배워내며 깨지고 부딪혔던 길목을 돌아 과거의 시간으로 물들었던 이곳을 분명하게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아까 도착했을 때보다 더욱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마음만은 꺼져가던 하나의 불을 환히 밝힌 것만큼 현실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겠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다시 또 쓸쓸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 한 번 더 찾아올게, 그때까지 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