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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Mar 31. 2023

감자의 결정

오늘 저녁거리도 정하기 어려운 결정장애 우리들에게

2017년. 여자친구이자 아내이자 베스트 프렌드인 콩자씨를 알고 지낸지 어느덧 6년째.


내 인생에 알고리즘이 있다면 2017년 이후 최상위 알고리즘 순위에 콩자씨가 랭크되어 있을 것이다.


2020년 10월 10일. 우리는 종교적인 절차를 밟아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꼬꼬마 부부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당시 감자 나이 22세, 콩자 나이 21세, 지금 생각해도 참 빠른 나이에 우린 큰 결심을 했다. 


2023년 지금. 우리는 함께 살거나 아이가 있지는 않다. 각자의 집에서 생활하며 거의 매일같이 만나 일상을 함께 하고 있다. 언제쯤 같이 결혼해서 살 거냐 묻는다면, 아마 콩자씨가 서울에서의 학업을 마치게 된 때. 약 1-2년 뒤쯤이 아닐까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어떻게 부부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부부가 아니라면 우리의 관계를 설명할 확실한 이름이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콩자를 대할 순 없는 지금이기 때문이다. 그런 깊은 사이이기에 군대라는 시기부터 말 못 다 할 여러 이야기들을 함께 이겨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지난 10월, 우린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스무 살이 되고 바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터, 여행을 가더라도 일주일 이상의 여행은 생각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우릴 가엾게라도 봐주신 듯,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군대 전역과 소방관 복직 이전, 잠깐이지만 시간이 생긴 것이다!


마침 휴학 중이던 콩자씨와 이번 기회에 인생 최대 추억을 남겨보고자 작당 회의를 해보았고, 결과는 역시! 세계 문화의 발상지! 우리가 꿈꾸던 그곳! 그래 우리가 유럽! 이탈리아에 가게 되었다!



모든 곳이 행복했다.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찰 만큼 행복한 곳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우리나라 환경과는 전혀 달랐고, 그 속에 적응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현지인들의 삶 또한 완전히 달랐다. 


잔잔한 운하들 옆 오밀조밀 줄지은 예쁜 상점이 있던 베네치아. 중세 시대에 퐁당 들어와 있는 것 같이 고즈넉한 안정감을 줬던 낭만의 피렌체. 걸어가는 걸음걸음 인류의 역사가 함께하며 깊고 진한 감동을 줬던 로마. 그런 로마의 위대함을 몸소 느끼게 해준 폼페이. 유럽인들의 뿌리를 보여준 거룩한 바티칸. 알프스라는 대자연을 마주하며 겸손을 가르쳐 준 돌로미티.


어린 나이부터 더 나은 삶, 발전된 미래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나라와는 다소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주어진 본인의 삶에 만족하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여유를 가지고 즐기면서 사는 모습들은 정말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사람들과 함께 하며 느낄 수 있었던 감동과 가르침은 엄청났고, 그때의 여운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좋은 곳에 콩자와 함께 있었다. 우리가 알던 낭만을 넘어선 낭만이 그곳엔 존재했고, 콩자와 그 모든 순간들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 많은 낭만 중 이탈리아에 있으며 내가 느낀 가장 낭만적인 도시는 단연 피렌체였다. 피렌체의 예쁘게 줄지은 건물들로 만들어진 마을 마을들은 고즈넉하면서도 마음이 편해지게 만들어줬다. 누구라도 이곳을 거닐고 있다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아마 그 특유의 안정감은 따라올 도시가 없을 것이다.


피렌체가 낭만의 도시라는 것은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때마침 여행 기간에 걸쳐 있던 우리의 종교 결혼기념일에 맞추어 피렌체 스냅샷 촬영을 예약하게 되었다. 우린 시선스냅이라는 곳의 은성 작가님께 의뢰를 하게 되었는데, 나름 이탈리아 스냅 촬영 쪽에서는 연예인처럼(?) 굉장히 유명한 분이셨다. 나름 일찍이 여행을 준비했지만 이미 예약이 거의 가득 차 있던 상태였던 터, 맘에 드는 시간대로는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운이 참 좋게도 가장 인기 있는 노을 타임에 빈자리가 생기게 되었고 절대 놓치지 않는 재빠른 콩자씨께서 쟁취해 주셨다.


예쁘게 차려 입고 피렌체 이곳저곳을 누비며 카메라 셔터를 따라다녔다. 빠른 걸음으로 바삐 돌아다녔음에도 아름다운 시내를 마주하며 놀라기 바빴던 우리였다. 바쁘게 걷는 것도 잠시. 작가님께서 예쁜 카페로 가서 촬영해 보자며 두오모 성당이 훤히 보이는 카페로 이끌어 주셨고, 잠시나마 작가님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작가님은 굉장히 자신감 넘치는 분이셨다. 자신의 일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셨고 본인의 신념과 가치관이 바로 서 있는, 진취적이고 멋진 분이셨다. 중간중간에 보여주신 사진들만 봐도 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 자신감 넘치는 작가님도 깜짝 놀라게 할 일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은 콩자와 감자의 "나이"였다.


작가님께는 신혼여행 온 30대 즈음 신혼부부가 대부분 의뢰를 해왔기에 이렇게 어린 커플이 찾아올 것이라곤 생각을 못 하셨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받은 커플 중 최연소 커플이라며 우리의 가치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해주셨다. 사진은 도대체 언제 찍나 생각될 정도로 우리의 앞날을 설계(?) 해주시며 우릴 치켜세워 주셨다.


생각해 보면 놀랄 일이 맞았던 것 같다. 한국 나이 24, 23살인 커플이 해외여행을, 그것도 유럽으로 떠난다는 것은 특수한 환경이 아니고선 어려운 일이었다. 일찍이 미래를 약속하고 부부로서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곳까지 떠나올 수 있었음을 느낄 수 있던 대목이었다. 아무쪼록 작가님께선 결혼식 사진으로도 쓸 수 있게끔 엄청난 사진을 남겨 주시겠다며 호언장담을 해주셨고 정말 영화 같은 사진들을 남겨주셨다.


이런 일이 하나 더 있었는데, 이탈리아의 알프스를 볼 수 있는 돌로미티로 향한 투어에서 있었던 일이다.


돌로미티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꽤나 까다로웠기에 소규모 투어에 참여하게 되었다. 투어에는 콩감자 말고도 한 커플이 더 있었는데, 서울에서 굉장히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4년 차 부부 형누님이셨다. 하루 종일 함께 다니며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식사도 함께 하면서 꽤나 가까워질 수 있었다. 쪼꼬미 둘이서 열심히 사진 찍고 즐기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셨던 것 같다. 특히 누님께선 유난히 작고 귀여운(?) 콩자씨를 예뻐해 주시며 관심을 가져 주셨다.


돌로미티 관광중인 콩감자


어쩌다 투어 중 형누님께 현금을 빌리게 되어, 투어가 끝나고 현금을 드리고자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빌린 돈을 드리고 돌아가려던 찰나, 형님께서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냐며 선뜻 물어봐 주셨다. 형님 왈 "누님 눈에 맘에 들기가 정말 어려운데 선택된 게 참 신기하다." 나는 가만히 있다가 깜찍하신 콩자씨 덕에 저녁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숙소 근처 중식당으로 향했고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형님께선 회사를 다니면서 서울에 "더풍년"이라는 음식점을 두 곳이나 운영하고 계셨고 누님께서도 멋진 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계셨다. 잠을 줄일 정도로 열심히 살아가며 기사에 나올 법한 삶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그런 흔히 뵙기 힘든 멋진 분과 함께 했던 것이었다. 콩자와 나는 우리가 뭐라고 이런 분들과 겸상할 수 있을까 했는데, 오히려 그런 형누님께선 우릴 참 멋지게 느꼈다고 말씀해 주셨다. 


가장 예쁜 나이에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꾸며 이렇게나 예쁜 곳에 함께 있는 우리가 멋지다고 말씀해 주셨다. 잘은 모르겠지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서 이끌림이 있었고 꼭 밥을 사주고 싶었다고 하셨다. 밥을 얻어먹으며 꼭 서울에 방문해 더풍년 식당에 가고자 약속했고 다음이 있길 약속했다.


죄다 감자로 만들어버려 죄송합니다. 감자네가 되어주심에 감자드립니다. 아니 감사드립니다.


이탈리아 먼 땅에 가니 세상을 새로 배울 수 있었다. 콜로세움, 피사의 사탑, 리알토 다리도 우리의 식견을 넓혀주었지만 결국 가장 큰 가르침은 사람으로부터 온 깨달음이었다. 열정적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을 만나 대화하며 그들의 삶을 배우고 그들의 열정을 조금이나마 닮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운이 참 좋았다.라고 말하기엔 너무 지나친 운이지 않을까.


이른 나이에 소방관이 되어 이른 나이에 콩자와 미래를 약속하고 콩자와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 어린 부부로서 설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물론 "인복" 최강자 감자이기에 좀 더 수월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나 잘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잘 결정했다는 것이지 않을까.


모두 똑같은 조건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불확실한 미래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에는 엄청난 부담이 따를 것이다. 열에 아홉이 결정 장애인 이 시대에 웬 결정 타령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언젠간 결정을 해야 그다음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고3. 아무 대학교도 지원하지 않고 소방 시험만을 준비했다. 주변에선 안전하게 수능 준비도 함께 하길 조언해 주었지만,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배수진을 치기로 마음먹었고 부정적인 시선 속에서도 나름 용기 있는 결정을 했었다. 


또 스물둘. 군대도 안 다녀온 내가 부부는 무슨이라며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있기엔 너무나도 감사히 내게 온 콩자님이셨다. 포기할 수는 없기에 더 용기를 내 결정했다. 물론 나보다 콩자님께서 더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생기니 자유로워졌다. 할 수 없는 일도 생겼지만(!?) 할 수 있게 된 일이 더 많아졌다. 사람에겐 모두 타이밍이 있고 우리의 타이밍은 그때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탈리아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함께 만나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우리의 타이밍이었고 그에 따른 우리의 결정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만 살다 가는 이 삶에서는 기준도 오직 나 하나여야지 않을까. 결혼을 일찍 하는 것도, 일을 일찍 시작하는 것도. 어떤 것이 좋고 나쁘고 비교해 보는 것은 그저 야박한 일로만 그치게 될 것이다. 기준은 모두에게 다르듯, 삶의 타이밍도 제각기 다르게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 땅 이탈리아에서 스냅샷을 촬영하며 유명인이 된 은성 작가님, 없는 시간을 만들어내 직장 생활과 사업을 함께 해낸 돌로미티 더풍년 형님. 모두 대단하고 비범한 능력을 가진 분들은 아니었다. 두 분 다 자신에게 찾아온 타이밍에 용기 있는 결정을 하신 것이다.


이때까지 잘 살아온 것 같지만 앞으로가 참 걱정이다. 그래도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속에 끝없는 결정이 동반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어차피 해야 할 결정이라면 어서 맞이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하다. 척박한 땅에서도 자라나는 감자도 싹을 움트고 뿌리를 내리기까지 나름대로의 타이밍과 결정이 있었지 않을까 조심스럽지 않게 생각해 본다. 


결정 장애로 살아가기엔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다. 오늘 저녁 뭐 먹을지 결정하기도 어려운데 앞으로는 어떡하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배고프면 뭐라도 먹어야 할 텐데, 이왕 먹는 저녁 맛있는 걸 먹으면 더 좋지 않을까.


뭐 좀 아쉬운 저녁이라도 괜찮다.


내일도 우린 세 끼나 먹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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