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받는 교사들을 위하여

나는 교사 중에서도 유독 스트레스가 없는 편이다. 무슨 내공이 있어서가 아니라 원래 성격이 그렇다.

내 학창시절,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유행했다. 마치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읽지도 않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제목만 보고 욕하느라 유명한 것처럼 <긍정의 힘>도 안 읽은 사람들 사이에서까지 유명했다.

막상 읽어보면 의외로 기독교 서적인데 기도하면 뭐든지 이루어지니까 전부 성공할 거라고 긍정하라는 내용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학창시절의 나는 반감이 들었다. 기독교의 신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필요한 거 뱉어내는 요술 자판기가 아니다. 종교인은 남보다 소원성취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반감 때문에 학창시절의 나는 긍정적이기가 싫었다. 뭐든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의 행복을 위해 낙천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긍정적인 사람이 "다 잘 될거야"라고 믿는다면 낙천적인 사람은 "잘 안 되면 어때. 괜찮아."라고 믿는다.

나는 낙천적인 사람이다. 이런 성격 탓에 학생들을 대할 때도 좀처럼 화가 나지 않는다. 학생들이 멋지게 성장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말썽을 부리면 좀 어때 괜찮아, 낙천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이 올바르게 행동하기 전에 미리 귀여워하고 아무거나 칭찬한다. 강아지 고양이 토끼같이 올망졸망한1학년은 말할 것도 없고, 수염 시커멓고 나보다 키가 큰 3학년도 귀엽다. 지나가다 학생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나처럼 미소짓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샘은 학생을 대할 때 근심으로 눈살을 찌푸린다. 어떤 샘은 분노로 호흡이 가빠지기도 하고 어떤 샘은 답답해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그럼 이 선생님들이 나보다 못난 마음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모두가 자기의 방식대로 가르치고 있다. 학생이 바뀔 거라는 긍정으로, 또는 사명감이나 개인적 신념으로, 또는 교육 철학이나 이념에 대한 동의로.
그러다보면 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생기기도 한다. 오히려 스트레스 받는 교사들이야말로 학교에 반드시 필요하다. 나같은 교사는 소수여도 된다.

잠수함이 갓 도입된 2차 세계대전, 당시 잠수함에는 산소 잔량을 측정할 시스템이 없었다. 그래서 산소에 예민한 동물인 토끼를 태웠다. 먼저 힘들어하는 토끼 덕분에 승조원들은 산소 부족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탄광에는 카나리아가 필요했고, 와인 저장고에는 장미가 필요했고, 학교에는 스트레스 받는 교사가 필요하다.
상황이 안 좋을 때 먼저 아파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남보다 민감한 경각심을 갖고, 먼저 울며 조심하는 존재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나는 학교라는 잠수함에서 잔여 산소량에 가장 둔감한 축에 든다. 교육청이라는 잠수함대 내에서도 그럴 것이다. 남들 힘들어할 때 눈치 없이 혼자 헤벌쭉, 나는 늘 행복하다고 히히덕댄다. 초임 시절엔 눈치 없이 그러지 좀 말라고 선배 교사한테 한소리 들은 적도 있다.
나같은 교사가 다수라면 "뭐야? 뭐가 문제길래 힘들어 하는 거야? 난 괜찮은데?"라는 태평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럼 누군가는 마음 아픈 티도 못 내고 뒤에 숨어서 아파할 것이다.
화내고 스트레스 받으며 학생과 학교를 개선하려는 민감한 교사가 다수여야 한다. 낙천적인 교사가 소수고 민감한 교사가 다수여야 학교 내외의 문제 상황을 빨리 알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고쳐낼 수 있다.

그러나 낙천적인 교사로서 나는 학교라는 잠수함에서 내릴 생각이 없다. 학교에 불필요한 존재라는 눈칫밥을 먹기도 싫다. 그럼 나는 교사로서 어떠해야 하는가. 내 낙천성은 어떻게 기능해야 하며, 남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나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문제에 누군가 걸려 넘어지고 아파할 수 있다면 어떻게 알아차리고 얼마나 도와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초임부터 지금까지 몇 년 내내 하는 중이다.

그러다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
내가 잘 못하는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요령은 남들을 보면서 천천히 배우고, 내가 잘하는 태연하고 낙천적인 점은 남들이 나에게서 배워가도록 마음껏 행복해 하자는 것이었다.
남을 들여다보면, 남도 나를 들여다본다. 힘든 사람은 나를 보며 쟤가 괜찮다고 하니까 나도 좀 마음 놓아볼까?
이러면 좋겠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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