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았다는 착각

욥기 20장 도를 안다 생각하는 것은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by 김민수


소발은 욥의 고백

“나, 나야말로 그분을 뵐 것이라네”(19:27)라는 말을 듣고,

강한 반발하며 말문을 연다.


“그러므로 불안하게 생각하다가 내가 대답하기로 했네.

내 속에 아픔이 가득하기 때문이라네.”(20:2)


소발은 말한다.


“내게 깨달음을 주는 영이 내게 대답해 준다네.”(20:3)


그러나 그의 말은 하나님이 주신 깨달음이 아니다.

그 말은 욥의 고통에 대한 공감 없는 자기 확신이며,

자기 분노와 도덕적 확신을 신의 음성처럼 포장한 것이다.

‘고통 받는 자는 죄가 있다’는 이 논리는 정확한 분석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욥의 절규와 현실을 무시한 폭력이다.


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1)


노자의 이 말은 진리를 손에 쥐었다고 착각하는 이들을 향한 경고다.

진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신비이며, 완결된 정의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것이 도다”라고 말하는 순간, 도는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소발의 말은 ‘도(道)’를 붙잡았다고 믿는 자의 오만이다.

그는 악인의 말로를 정의하면서, 그 속에 욥을 몰아넣는다.

그러나 그 ‘도’는 진짜 도가 아니다.

그것은 ‘설명된 도’, ‘해석된 도’일 뿐,

존재 깊숙이 체화된 진리도, 고통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깨달음도 아니다.

진짜 깨달음에 이르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달음의 문지방에 섰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발은 마치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처럼 말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평면적인 권선징악의 반복이고,

욥이 당하는 고통의 현실과는 무관한 교훈일 뿐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자신의 분노와 생각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처럼 포장한 언어일 뿐이다.

착각의 깨달음은 삶을 외면하고, 사람을 지운다.


소발은 이렇게 말한다.

“악인들이 기뻐 외치는 소리는 오래가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의 즐거움은 잠깐뿐이라는 것을!” (20:5)


그는 악인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하고,그 끝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로 마감된다고 말한다.


“그는 재물을 삼켰다가 토해 낸다네.

하나님이 재물을 그의 배에서 빼내신다네.

그는 살무사의 독을 빨고, 뱀의 혀에 목숨을 잃는다네.” (20:15,16)


그러나 이 모든 말은지금 눈앞에 있는 욥의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한 말이요,

욥을 비난하는 말이다.

욥은 지금도 스스로의 무죄를 항변하고 있고,

그의 고통은 결코 악인의 전형적 말로와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소발은 욥의 고통을 악인의 징벌로 일반화하며 말한다.

논리는 옳을 수 있으나,

논리를 설파하는 이의 자리가 잘못되었으면 그 말은 결국 폭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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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깨달음은 혼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내재화했을 때 비로소 도달하는 선물이다

소발은 자신의 논리를‘깨달음을 주는 영이 내게 대답해준 것이라면서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하나님이 대답해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 확신과 분노의 반영일 뿐이다.

만약 그가 진정 깨달았다면, 욥의 고통 앞에서 침묵했을 것이다.


공감 없는 확신은 깨달음이 아니라 착각이다.

소발의 말은 그저말하는 자의 생각을 지키려는 무기일 뿐이고, 일반화된 정의일 뿐이다.

소발의 말은지금 고통 속에 있는 욥의 삶에는 적용될 수 없다.

소발은 일반화된 진리로 욥을 꾸짖고 있지만,

결국 욥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소발의 말은 정답처럼 보인다.그러나 그 말은 욥의 고통에 조금도 다가가지 못한다.

삶이 빠진 말,

고통당하는 자의 처지가 지워진 말은오로지 정죄하는 말로 남을 뿐이다.

소발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상처 입은 이를 무너뜨리는 칼이었다.


참된 말은

상대의 눈물의 심연을 지나온 말이며,

말의 탑은,

타자를 향한 연민 위에 세워질 때에만 신의 언어를 닮는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말하며 타인을 정죄한다.

그러나 그 ‘뜻’이 고통 받는 자에게는 비수가 되기도 한다.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하는 자,

삶이 무너진 이에게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 말하는 자,

그들은 소발의 말을 반복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은,

침묵하시는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도덕의 우상일 뿐이다.


참된 깨달음은

고통에 참여한 언어,

눈물에 젖은 침묵,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인 겸손으로 나타난다.

진리는,

고통 받는 자 곁에 있을 때 드러난다.

말이 많을수록 도에서 멀어지고,

확신이 강할수록 신비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깨달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시작된다.

그 순간 마음의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구상 시인(1919~2004)의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라는 시 ‘81’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두이레 강아지만큼

신령(神靈)에 눈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萬物萬象)이

저마다의 은총의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의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2)


그렇다.

참된 깨달음은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할 때 시작된다.

하지만, 소발에게는 욥의 고통이 없다.

타자를 향한 연민도 없다. 공허하고 잔인하다.

그래서 참된 깨달음과 멀지만, 정작 본인은 득도했다 착각하는 것이다.


주:

[1] 노자, 『도덕경』,현암사, 2009, 오강남 옮김, P.19.

[2] 구상,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홍성사, 2002, 구상문학총서 제1권 자전 시문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라는 시의 일부를 발췌함.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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