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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로 Apr 23. 2023

<스즈메의 문단속> 혹은 다이진의 침묵

다이진의 관점에서 바라본 <문단속>

*글 내용에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의 스포가 될만한 내용이 있다.


이 글은 이전글(https://brunch.co.kr/@ganro/117)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문단속>의 전개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다이진의 변덕과 회심이다. 프롤로그 후 요석 역할에서 벗어나 떠나버린 다이진을 스즈메와 소타가 추적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런 다이진이 다시금 요석으로 돌아가기로 하면서 끝난다.


조용히 요석노릇을 하던 다이진은 왜 갑자기 변덕을 부리는가?


스즈메는 소타를 찾아 들어선 폐허의 문에서 재앙신 미미즈를 묶어두던 요석을 뽑아 재앙을 봉인하는 신, 다이진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다이진은 뜻밖에 자기를 풀어줬다 할 수 있는 스즈메의 집에 온다. 남몰래 발길을 쫓기라도 한건가. 그리곤 멸치 몇마리와 물을 얻어먹곤 스즈메에게 다정함을 느끼고 소타에게 저주를 걸어 의자로 만들어버린다. 스즈메의 곁에만 있고 싶은데 그녀의 옆에서 다이진에게 요석으로 돌아가라고만 하는 소타가 방해물로 보였겠지.


여기서 가장 흥미로웠던건 '봉인'의 개념이었다. 봉인의 주된 대상은 당연히 재해를 가져오는 재앙신이겠지만, 생각해보라. 실상 봉인되어있는건 미미즈만이 아니다. 그 봉인은 요석이었던 다이진도 묶어두었던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다이진 또한 수많은 세월동안 미미즈와 함께 묶여있었다.


스즈메는 요석을 뽑아 미미즈를 풀어낸 것이면서 동시에 다이진을 해방시켰다. 오랜동안 요석으로 있었다가 풀려났다면 그 해방감이 얼만큼 클 것인가. 나같으면 당장 멀리멀리 도망치는 식으로 얼른 그곳을 벗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녀석은 그러지 않는다.


다이진의 첫 행보는 자신을 풀어준 스즈메에게로다. 스즈메가 처음 본 이녀석은 굶주려 빠싹 말라있다. 이 녀석은 스즈메가 준 음식을 먹고 순식간에 살집이 올라오지만 그건 음식을 먹고 배불러서가 아니다. 후반부에 나오지만 이 녀석은 스즈메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서 다시 삐쩍 말라 버린다. 그럼 이 녀석을 채워주는 것은 음식이 아닌 사랑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다이진이 갈구하는 것은 사랑이다. 요석 노릇을 하느라 오랜동안 돌이 되어 있었으니 퍽이나 외로웠던게 아닐까. 요석이 된 소타의 모습에 스즈메도 이러지 않는가, '그것은 압도적으로 고독한 광경이었다.'고.


다이진은 이런 자신에게 끝없이 요석으로 돌아가라고만 하고 스즈메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소타를 의자로 만들어 요석 역할을 넘겨버린다. 그리고서는 재앙신이 풀려날만한 곳을 돌며 스즈메가 자신을 계속 따라오며 갈구하게 만든다.


그렇다. 다이진의 변덕을 가져온 원인은 스즈메에게 있으니 그것은 사랑이다. 이 현세에서 스즈메의 상냥함을 느낀 이상 그가 이대로 순순히 저 세계의 요석으로 돌아갈수는 없으리.


그런데 이 녀석은 어떤 존재이길래 사랑을 갈구하는가?


후반에 힌트가 될만한 씬이 있다. 소타의 할아버지가 스즈메에게서 손자인 소타가 요석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서 하는 반응은 그저 "그러냐."는 말뿐이다. 마치 있을법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럼 여기서 세워볼만한 가설이 있다. 다이진도 소타와 같지는 않았을까. 그도 재앙을 관리하는 토지시였고 어떤 일을 계기로 요석이 되어버린. 이건 소타가 요석이 된 것에 대해 소타의 할아버지가 명예로운 일처럼 묘사하는 것에서도 드러나지 않는가. 일전에도 충분히 있던 사례라는 것. 그 사례 중에 하나가 다이진일 수 있지. 


다이진의 정체에 대해서 눈치챌만한 부분이 고베의 스낵바에서도 나오는데, 스즈메의 눈에 주점에 들어와 놀고있는 다이진의 모습을 두고 여주인이 잘 나가는 젊은 남자 사장처럼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냥신 다이진은 진짜 젊은 남자는 아니었을까. 소타처럼 말이다.


이 전제가 맞다면, 


다이진이 토지시였고 소타처럼 어떤 계기를 거쳐 요석이 된 것이라는건데 재앙신 미미즈를 봉인하여 수많은 인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결박당해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이진(또한, 마찬가지의 존재로 추정되는 사다이진도)은 일종의 희생양인 셈이다. 무슨 소리냐고? 구도를 생각해보라.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삶을 보전하기 위하여 재앙을 막자는 목적으로 멀쩡한 젊은 사람이 오랜시간을 고독하게 요석으로 봉인되어 있었다는 것을. 세계관에 따르면 불가피하다 할지라도 무고한 한 사람의 삶이 다수의 평안을 위해 바쳐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수의 안녕을 위해 바쳐지는 희생양. 저 세계에 차가운 요석이 되어 박혀있는건 현세에선 죽은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이건 일종의 인신공양 아닌가? 

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인간사회에서 희생양 문화는 꽤 뿌리깊게 존재해왔다. 인신공양도 그중 하나.

작에선 다이진이 원래 어떤 존재였는지는 잊혀져 있다. 녀석의 정체는 간접적 정황으로만 암시되며 다른 인물들은 원래부터 다이진을 미미즈를 봉인하던 신으로만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다수를 위해 한 명을 희생하는 상황과 구조 자체에 대해서는 등장인물들 중 그 누구도 부조리함을 느끼거나 의문시하기 힘들다. 모두들의 행태에는 기존의 그런 희생 구조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게 전제되어 있다. 모두 입모아 하는 말은 다이진, 너는 너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다. 당연히 넌 원래 그랬으니까.

오로지 희생양, 다이진만이 더이상 요석 역할을 하기 싫다고 외치고 있다. 


다이진이 인간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냐고? 다이진이 그저 신이라 해도 그 구도가 크게 다를까 싶다. 녀석은 사랑을 갈구할 줄 아는 존재다. 심지어 사랑받느냐에 따라 삐쩍마르거나 뽀얗게 포동포동해질 정도로. 그런데 녀석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존재가 아무도 안보인달까. 사랑을 바라는 이 녀석의 감정을 아무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 다이진이 스스로 요석으로 되돌아가기로 회심한 직후에야(왜 하필 이때였을까?) 스즈메가 다이진의 마음을 진지하게 대했다고 볼 여지가 겨우 생기는 것도 흥미롭긴 하다.


<문단속>은 마음을 다루려는 영화지만, 예외적으로 다이진 이 녀석의 마음만큼은 철저히 침묵당한다. 작중 인물들 중 간절한 마음에 좌절만을 느낀 건 다이진이 유일하지 않은가. 다이진의 마지막 말이 잘 보여준다. "난 스즈메의 새끼 고양이가 되지 못했어..." <문단속>은 다이진에게만큼은 해피엔딩이 아닌듯하다. 난 이게 퍽 괴이하게 보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스즈메만큼이나 다이진의 궤적도 참 처절하게 느껴지더라.


한번 생각해보자, 디즈니라면 동일한 세계관에서 다이진의 결말을 그렇게 그려냈을까? <알라딘>의 지니가 결국엔 램프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해보면 이야기 내에서 재앙 구조 자체의 변화같은걸 가져와서라도 다이진도 어떻게든 자유롭게 함께 살게되는 결말로 그리지 않았을까. 이 지점에서도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관은 특징적으로 보인다.

램프의 요정 지니, 그의 운명은 분명히 다이진과는 달랐다.

사랑을 원하는 존재에게 그저 희생양의 위치로 돌아가라는게 당연시되는 세계. 

녀석의 마음에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세계.

결국 희생양의 자리로 스스로 되돌아가기로 하고나서야 겨우 관심을 받는 세계.


이런 세계란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곳일까?


(다음글 https://brunch.co.kr/@ganro/128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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