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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람 May 23. 2023

누구 우리에게 요트를 가르쳐줄 사람 없소

요트조종 면제교육 이후, 본격적으로 요트 배우기

내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깨닫게 된 삶의 진리가 있다면, 일이 되게 만드는 것도, 안 되게 만드는 것도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혼자 성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요트 덜컥 주문하고, 두어 달이 지나 배가 도착했다. 사실 그때 우리는 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1도 모르는 상태였다. 요트면허 면제교육을 받은 지도 벌써 5개월이 지나 있었는데 그나마 면제교육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실습만 진행했을뿐더러 배의 성향도 매우 달라서 우리 힘만으로 요트를 다루기는 역부족이었다. 묵직한 40피트 크루즈 요트가 승용차라면 날렵한 킬보트는 모터사이클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여러 명이 손발을 맞추어 다뤄야 하는!


아직 요트학교에는 면제교육 이후 지속적으로 요트를 배울 수 있는 과정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킬보트 세일링을 배울 수 있도록 실업팀의 감독님을 소개받았다. 그분은 무려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 초짜인 우리가 독선생으로 모시기에 명백한 오버스펙이었지만 어쨌든 제대로 요트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생겼다는 것이 기뻤다.


일단 킬보트를 타려면 우리는 역할을 정해야 했다. 처음에는 일단 한 가지 역할을 익히고 그 상태로 호흡을 맞 후,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역할을 바꿔가며 훈련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약간의 시행착오 끝에 결정된 4명의 인적 구성은 흥미롭게도 후아에서 맡고 있는 역할과 비슷했다. 후아 CEO인 민진하는 배를 통솔하는 스키퍼, 개발자 이현은 메인 세일을 다루는 메인 트리머, 배의 추진력을 만들어내는 집 세일을 다루는 집 트리머가 부대표인 나, 현장에서 셀러들을 만나고 영상과 사진 촬영을 돕는 민진영이 바우맨이었다.


유독 스키퍼가 늠름해보이게 나온 사진


이렇게 역할이 정해진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단 우리 중 딩기를 가장 잘 타던 사람이 민진하였다. 딩기는 혼자서 배를 조종하고 경기전략을 짜야하는데, 딩기를 잘 타는 선수들은 킬보트를 타면 으레 스키퍼나 메인 트리머를 했다. 이현도 제법 딩기를 잘 탔기에 우리의 첫 항해에서는 이현이 스키퍼, 민진하가 메인 트리머였다. 우리는 이현이 딩기를 탈 때처럼 자유자재로 배를 다룰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현이 스키퍼를 맡자 요트가 엄청나게 기울어지더니 거의 엎어질 지경이 되는 것이 아닌가(좌우를 헷갈렸다고 한다). 그날 바람이 좀 세긴 했지만 이현에게 우리의 목숨을 맡기기는 조금, 아니 많이 불안했다. 설상가상으로 민진하는 메인시트를 당기다가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 민진하가 스키퍼, 이현이 메인 트리머를 맡게 되었다.


내가 집 트리머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킬보트를 타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는 자, '풍맹'이었기 때문이다. 스키퍼와 메인 트리머, 바우맨 모두 바람을 잘 읽어야 한다. 물론 집 트리머도 바람을 읽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보다는 힘을 써서 세일 콘트롤을 잘하면 되는 역할이기에 나는 꼭 집 트리머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도저히 다른 역할을 잘할 자신이 없었다.


무자비한 태양에 익어가는 우리의 피부 (feat. 내가 너구리가 된 이유)


감독은 나중에 회고하며 말하길, 이때 내가 집 트리머를 하겠다고 우겨서 상당히 곤란했다고 한다. 집 트리머는 태킹(Tacking, 풍상에서의 방향 전환)과 자이빙(Gybing, 풍하에서의 방향전환)을 할 때마다 빠르고 정확하게 시트를 당겨야 해서 보통 힘 좋은 사람들이 할뿐더러, 배에서 이리저리 구르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나는 팀 내에서 최연장자인 데다가, 얼핏 보기엔 그렇게 강인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다행히 요트는 힘보다는 타이밍과 요령, 전략으로 하는 스포츠이고, 또 도구를 쓰기에 따라 부족한 힘을 보완할 수 있는 특성이 있어서 여자라고 딱히 집 트리머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전 있는 게 힘밖에 없어요!"라고 강력 어필을 해결국 집 트리머 역할은 나에게 돌아왔다.


사실 나는 그 당시 엄청난 오산을 하고 있었는데, 집 트리머가 태킹할 때 집 세일만 움직이면 되고, 다른 일은 할 필요가 없는 ‘꿀보직’인 줄 알았다. 하지만 교육이 더 진행되면서 풍하로 내려갈 때 제네이커를 콘트롤 하는 것도 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집 트리머가 되겠다고 고집부린 것을 약 2초 정도 후회했다. 제네이커는 엄청나게 큰 돛이라, 바람이 센 날은 잘못하면 제네이커 시트를 잡은 채로 사람이 바다 위로 휙 날아갈 수도 있을 정도로 빡센 역할이다.


제 표정이 죽을 것 같아 보이는 건 정말로 죽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훈련했을 때는 힘이 좀 달리긴 했는데,‘이 줄을 놓으면 난 끝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냥 버텼더니 몸이 적응했는지 한 두 달 후에는 나름 할 만하게 되었다.


몸이 날렵하고 힘이 좋으며 바람도 잘 읽는 민진영이 바우맨으로 낙찰되었다. 사실 민진영은 만능요트소녀이기 때문에 무슨 역할이든 할 수 있었다. 바우맨은 택킹과 자이빙을 할 때, 배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고 제네이커를 올리고 내릴 때는 배 밖으로 몸을 뻗는 등의 일을 해야 하기에 꽤 위험한 역할이다. 아직까지 민진영은 한 번도 항해 중 바다에 빠진 적은 없지만, 순간 아찔했던 적은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이후로 두어 달간 우리는 매 주말, 때로는 금요일까 빼서 무지막지한 훈련 스케줄을 소화했다. 감독님은 워낙에 선수 출신인지라 적당히 가르치는 것을 못 하는 성격이었고, 우리도 안 하면 안 했지 대충 배우는 것은 못 하는 인간들이었다. 2~3시간 훈련 세일링을 하고 돌아와서 고프로로 찍은 훈련영상을 TV에 틀어놓고 디브리핑, 저녁식사 테이블에서도 이론수업, 치킨집에 가서도 맥주를 마시며 계속 복기를 했다. 우리는 원래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사람들을 만나서 물어보니 동호인 중에 우리처럼 죽자고 요트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고 했다. 보통 이런 식으로 했다간 하루이틀 만에 모두 도망가버린다는 것이다.


트리밍을 잘못한 게 아니고 정말로 이 각도로 기울어서 가는 것이 요트라네


훈련 내용은 일단 배를 바다에 띄우고 킬을 내리고 세일을 세팅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풍속에 따라 메인 세일과 집 세일을 적절한 위치에 놓는 것, 돛에 달린 텔테일이라는 털실이 흔들리는 모습으로 바람을 읽는 법, 택킹과 자이빙의 타이밍과 요령, 스키퍼로서 크루를 지휘하는 방법, 크루로서 스키퍼에게 정보를 주는 요령, 바람과 코스의 변화에 따라 붐뱅boom vang, 아웃헐outhaul, 커닝햄cunningham같은 작은 줄('시스템'이라고 한다)을 움직여 메인세일의 모양을 어떻게 조정하는지, 제네이커를 올리고 내리고 조종하는 방법 등, 배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한 기초적인 것들로 이루어졌다. 그렇다. 지나고 나서 보니 요트면제교육은 오리엔테이션이었고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초급 과정이었다.


그렇게 선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동호인 수준은 꽤 뛰어넘는 빡센 훈련 스케줄에 따라 각자의 역할이 손에 익어갈 때쯤, 감독님은 우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요트 대회 한 번 안 나가볼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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