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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Mar 09. 2021

말할 수 없음에 대하여


https://youtu.be/gRzqyEyKdXY


  이 신비는 거짓된 신비이며, 나는 정말로 깊이를 보지 않는다. 즉 만약 내가 깊이를 본다면 그것은 또 다른 너머이다. 나의 두 눈을 지평에 결합하는 그 선상에서 맨 처음으로 나타나는 평면은 다른 평면들을 영구히 숨긴다. 그리고 만약 일정하게 배열된 대상들을 측면에서 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상들이 서로를 전혀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르게 계산된 너비에 따라 대상들이 서로 다른 대상 바깥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깊이의 이족에, 즉 깊이를 넘어서 있다. 사물들은 결코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들간의 잠식과 잠복은 사물들을 정의하는 데에 포함도지 않으며, 사물들 중의 하나인 내 몸과 내가 불가해하게 맺는 유대를 표현할 뿐이다. 그리고 사물들이 실증적으로 갖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내가 형성하는 사유이자 사물들의 속성이 아니다. 즉 나는 동일한 한 순간에 다르게 자리를 잡고 있는 다른 한 사람- 더 잘 말하면 도처에 편재하는 신 - 이 사물들의 은신처를 찾아 들어갈 수 있고 그 사물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보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깊이라 부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아니면 내가 제한 없이 존재에 una Erre에 참여한다는 것, 그러니까 우선 모든 시점을 넘어선 공간에서 존재자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물들이 서로를 잠식하는 것은 사물들이 서로 다른 사물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증거는 내가 그림을 보면서 깊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은 깊이를 가지고 있지 않고, 나에게 환상에 대한 환상을 조성해줄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다른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보게 만드는 2차원의 이 존재, 그것은 구멍난 존재이다.그것은 르네상스 인들이 창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그러나 창은 상호 외적인 부분들에서만 마침내 열린다. [말하자면] 창은 또 다른 편견에 의해 보일 뿐인 높이와 너비에서만 마침내 열린다.[다시 말하면] 창은 존재의 절대적인 실증적 상태에서만 마침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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