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

by 정원에

출발 전부터 11시간 넘는 비행시간동안 할 것에 대한 준비를 나름 철저(!)하게 했다. 그중 왕복 22시간이 약간 넘는 시간을 아주 건강하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던 신의 한 수는 일반 좌석을 비상구 앞 좌석으로 2인 왕복 58만 원을 더 지불하고 바꾼 것이었다. 아마 별일 없으면 다음에도 그 좌석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어제도 그런 기사를 읽었다. 코로나 이후 방학까지 겹친 극성수기에 항공권이 정상가의 세네 배는 상승했다고. 실제 일정이 갑자기 정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짧은 시간에 항공권을 구입해야 했다. 그런데 이코노미가 1인당 왕복 660만 원이 넘었다. 직항이. 왜 환승 노선이 직항의 절반 넘는 가격대인지 몸소 체험하는 것도 낫 배드였다.


돌아올 때 최대의 관건은 요통을 최소화하면서도 11시간 동안 절대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착 다음날 하루 쉬고 바로 출근을 해야 해서 시차를 최대한 없애야 했기 때문에 세운 목표였다. 한국 시각으로 전날 오전에 출발해서 다음날 오후에 도착하는 비행 편이라 전날 푹 자고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안 자는 것. 그리고 도착해서 저녁에 되어 잠에 빠지면 되는 것. 그러면 오전에 출발해서 오후에 도착하고 밤에 잠을 잔 것이기 때문에 시차에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시차는 낮밤이 뒤바뀌어 수면에 방해를 받는 경우에 수면 패턴을 다시 찾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니까. 다행히도 출발할 때 만석이던 비상구 주변 자리가 올 때는 한 자리 빼고 다 비어 있었다. 덕분에 의자를 10시간 가까이 뒤로 완전히 젖힌 상태에서 앉아 있을 수 있어서 더욱 편안했다. 그 상황에서 11시간의 비행 동안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었다.


코어 스트레칭

을 틈날 때마다 했다. 일단은 11시간 동안 잠에 빠져들지 말아야 했다. 늦게 도착해서 다음날 하루 쉰 다음날 어제 푹자고 나온 듯 출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냥 출근해서 자리만 지키는 게 아니라 한 시간에 한 명씩 퇴근 전까지 개인별 진학 카드를 꾸려 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 사이에 2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이 과정을 5일 연속 진행해야만 하기 때문에. 특히, 상담할 때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허리 통증을 감수하면서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칭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했다. 앉아서 하고 서서 하고. 아주 천천히 부위의 텐션을 느끼면서. 물론, 비상구 좌석 앞 텅 빈 공간에는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대기하는 이들이 가끔 서 있다. 그럴 때는 앉아서, 없을 때는 서서 동작을 이어갔다. 딱 한번 승무원 중 한 분(따님이 승무원 중 경력이 조금 더 많아 보이는 그분 표정이 즈마야 오빠네 엄마를 닮았다고 좌석에 앉으면서부터 기분 좋아했던)이 물었었다. 어디 불편하시냐고. 잠을 못 드는 것 같다고.


1)좌석에 앉아 있을 때는 의식직으로 복근에 힘을 주기. 허리 말고 배에 힘을 주기. 배가 블룩 하게 밀려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기(이 동작을 할 때 케겔 운동을 의식적으로 같이 하면 심호흡과 복근에 힘주기가 연속 동작으로 편안하게 이루어진다). 2)치골 부분을 의자 끝에 걸터앉은 후 상체를 세워 뒤로 살짝 젖힌 상태로 멈추기. 단, 등이 의자에 닿지 않게 비스듬한 상태에서 버티기. 3)양다리를 수평으로 뻗고 발가락을 당기면서 복근에 힘주기. 마치 복근을 중심으로 내 몸이 브이 모양이 되는 것처럼 상상하기. 4) 서서 발꿈치 들어 올리기. 이때 손으로 옆구리를 감싸 쥔 후 발꿈치를 들어 올릴 때 엄지손가락으로 자극이 되는 분위를 힘껏 눌러주기. 5)발꿈치를 든 상태에서 멈춰서 버티기. 단, 손은 옆구리 옆으로 내려뜨리기(이 자세가 큰 도움이 되었다. 공중에 떠 있는 비행기는 쉬지 않고 미세하게 살짝살짝 흔들려줘서 균형을 잡으려 힘주는 자체가 아주 효과적인 스트레칭이 되었다). 6)허리를 뒤로 힘껏 젖히고 앞으로 최대한 숙이는 동작 반복하기(이 동작은 밴쿠버에서 침을 맞으면서 하게 된 동작. 숙였다가 상체를 천천히 들어 올릴 때 허리 근육을 이용하는 게 포인트. 한국에서는 절대 앞으로 숙이지 말아야 한다고 해서 금지하던 동작이었다).


기대식

을 즐겼다. 코어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옆자리 따님은 숙면에 빠졌다, 깨었다를 반복했다. 도착해서 최소 일주일은 집에서 쉴 수 있어서 시차 적응에 부담이 없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렇게 깨어나면 그런다. 아빠, 배고파. 기내식 언제 나오지. 그렇게 기내식은 따님에게 기대식이 되었다. 참 다행이다 싶었다. 먹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 내내 잠에 빠져 있거나, 속이 안 좋거나 했던 어릴 적 기억 때문에. 속으로 참 많이 컸다 싶어 기분이 그냥 좋었다. 그렇게 타자 마자 첫 번째 잠에 빠졌다 깨어났을 때 실내등이 파바박 켜지면서 앞치마를 한 승무원들이 쟁반을, 컵을, 카트를 끌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즈마야네 엄마를 닮았다는 분이 앞장을 서고 뒤에 한 분이 더 따라서 움직였다. 따님과 나는 두 번의 기내식(스테이크&비빔밥, 치킨&파스타)을 하나씩 받아 나눠 먹었다. 그러는 동안 레드 와인 한잔, 화이트 와인 한잔, 커피 한잔도 함께. 빈말이 아니라 이번 비행에서 기내식은 정말 기대식이었다. 맛있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게 없었다. 깔끔했고, 과하지 않았고, 다정했다. 더욱 따님이 싹싹 비우면서 다 먹고 내 것까지 먹는 게, 출입국 수속은 귀찮은 데 비행기는 계속 타고 싶다고 재잘거리는 게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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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아주 자주 마셨다. 심사대를 통과하면서 버려지게 되면 게이트에서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까지 한 번도 물을 챙긴 적이 없다, 는 생각이 이번에 처음 들었다. 왜 그랬는지. 이번에도 처형이 챙겨 준 따듯한 메밀차가 절반정도 남기고 버려졌다. 탑승 시작 십여분 전. 화장실을 들렸다 나오는 데 남자 화장실 입구 쪽 벽면에 두 사람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개수대였다. 나의 정서상 물은 그런 곳에서 퍼담는 게 아니라 생수병을 하나 사는 거, 그거였다. 수돗물이잖아. 이런 느낌. 그런데 이번 한 달 가까이 지내다 보니 물은 다 개인적으로 챙겨서 들고 다니는 거였다. 그것도 플라스틱 생수병이 아니라 크고 작은 텀블러 하나씩. 그래서 따님이 혼자 짐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재바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기내용 캐리어에 넣어 두었던 비어 있는 보라색 텀블러를 꺼냈다. 다시 돌아와 그 개수대에서 물을 받았다. 조금 받아 마셔봤다. 어, 괜찮았다. 내 뒤로도 두 세 사람이 물을 담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인천 공항에서도 그런 개수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안전하게 만든 물이니 마셔도 괜찮다, 는 식의 자그마한 안내 문구가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여하튼 11시간 내내 700ml 정도 되는 그 텀블러의 물을 조금씩 조금씩 자주 마셨다. 그 덕에 좌석 바로 앞에 있는 화장실도 꽤나 자주 갔다. 그렇게 물을 마시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고 화장실에서 손도 자주 씻고 얼굴에 물칠도 좀 하면서 움직인 게 훨씬 더 몸을 피로하게 만들지 않았다.


하트를

눌렀다. 일본 상공을 통과할 무렵. 도착 2시간이 조금 넘게 남은 시각. 마의 시각이었다.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살짝 눈을 감으면 좁고 깊고 어둑한 통로뒤쪽으로 온몸이 폭 하고 한없이 미끄러져 들어갈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 코어 스트레칭 동작을 천천히 되감았다. 지나가는 즈마야네 엄마와 눈인사도 나누었다. 물도 몇 모금 더 마셨다. 화장실도 한번 더 들렸다. 그리고는 화장실 안에서 한참을 있었다. 세수도 하고 손도 씻고 입속도 헹궈내고. 그렇게 나와서 한쪽 다리를 90도를 들어 접고 반대쪽 다리로만 버티는 자세를 취했다. 아, 그 자세를 취하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앉아 있으면 잘 모르는 미세한 진동이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 허리로 이어지는 근육을 자잘하게 쪼개어서 마구마구 흔들어 댔다.


그렇게 몸을 조금 풀고 앉았다. 개운했다. 뒷자리에 아무도 없는 공간 깊숙이 의자를 힘껏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양다리를 들어 앞으로 쭈욱. 어깨를 뒤로 쭈욱. 힘껏 텐션을 유지한 채 온몸을 늘어져라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 출발 전에 구입해서 끼운 256G SD카드 공간을 들여다봤다. 1386개, 12.82G를 차지한 사진과 동영상이 가득했다. 25일간 움직이면서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휴대폰에 담은 것들이었다. 장소와 사람들이 가득했다. 에피소드들이 이어졌다. 항상 햇살이 눈부시고 그 햇살을 머금은 사람들의 미소가 아름다웠다. 고마웠고 사랑스러웠다. 갤러리로 들어가 마구 찍어 놓은 사진과 동영상에 빨간색 하트 표시를 했다. 이 표시를 해두면 하트 표시된 것만 따로 즐겨찾기에서 모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드님덕에 이번에 처음 알았다, 는 사실은 안 비밀이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면서 떠오르는 에피소드, 영수증, 사람, 장소와 자동으로(!) 연동되는 키워드들은 메모장에 저장했다. 아마, 시간이 되면 기억을 살려내면 이 키워드들이 짧고 긴 하나의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예정보다 30분 가까이 늦게 도착해서 내국인 전용 입국 수속대에 여권 하나만 가져다 되기만 했다. 그걸로 입국 절차는 끝이었다. LA공항에서, 터코마 공항에서 인상 쓰며 노려보던 이들과 눈싸움 한번 못하고 얌전한 고양이처럼 눈길을 외면하던 나는 온대 간대 없이. 아, 이제 한국이구나 싶었다. 출국 전전날 잃어버렸다 출국 전날 극적으로 찾은 여권을 다시 한번 들여다 가슴으로 안아줬다. 머쓱해하면서 하지 않던 이런 동작을 이제는 조금 철이 들어 일부러라도 한다. 매사가, 매 순간이 고맙다는 걸 내 몸이 기억하라고. 그런데 그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11시간이 아니라 한 시간 반정도 편안한 고속도로를 크루즈 기능으로, 자율 주행으로 달려온 기분이었다. 다음 비행에도 비상구 좌석도 물이 가득한 텀블러 하나는 필수이지 싶다. 기대식에서 마실 수 있는 와인은 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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