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와 옵션의 경계

[일나쓰] 3_레버리지(롭 무어)

by 정원에

어제. 열여덟 따님이 생애 첫 IELTS 시험을 보는 동안 어머님댁을 다녀왔다, 순간 이동처럼. 동교동에서 인천 용현동까지. 그렇게 짧게 다녀온 적은 결혼 이후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아주 오래된 김치 냉장고에 며칠 전 하신 김장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엊그제 전화 한 통화 때문에.


폐암 수술 후 여전히 통원치료 중이신데, 우리와의 약속(?)을 어기시고 김장을 혼자 40 포기나 하신 거다. 여전히 자식처럼 포기를 못하시고 비밀(?)스럽게 하시려다 전화 한 통화에 그만. 그래서 그러셨는지 오전 영역이 끝나고 밥 먹으러 나올 따님 시간을 맞추느라 마음이 급한 나보다 어머님이 서너 배는 더 급하셨던 가 보다.


지인이 서산 노지에서 며칠 전 수확해서 건네주셨다는 향긋한 갓 - 내가 정말 좋아하는 어머님표 갓김치다 - 이 맛깔스럽게 김치가 되어 커다랗게 한 통, 깍두기와 오이지가 환상적으로 만난 오이지 깍두기가 한 통, 작전처럼 홀로 하신 40 포기를 3 등분한 해 쌀포대처럼 커다란 김장 봉투에 담아 꽁꽁 묶어 놓은 신 자루 하나.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입구에 이미 가지런히 나와 있었다. 나의 허리통증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세 개로 소분해 놓으신 거다. 그 덕에 장인어른이 진하게 노란 믹스커피를 자그마한 한 컵에 두 봉지를 타시는 동안. 2층 계단을 내려와 앞에 임시로 세워 둔 차 뒷 트렁크에 가뿐하게 들어 실을 수 있었다.


그런데, 8년이 넘은 내 차 트렁크는 자동문이다. 버튼을 누르면 삑, 삑 거리면서 열린다. 김치통을 든 채 톡 하고 누르면 된다. 그렇게 소분된 세 개의 김치 자루를, 손쉽게 트렁크에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톡 한 번이면 윙, 윙 거리면서 닫힌다. 그렇게 나의 옵션은 차에 한해서만 봐도, 내비게이션, 에어컨이 더 있다.


내 동생 트럭에는 물건을 싣고 내리는 리프트가 장착되어 있다. 무거운 김치 냉장고를 흠집 나지 않게 가볍게 싣고 내릴 수 있게. 자동차가 움직여 이동한다는 본질에만 국한하면 그런 리프트도, 트렁크가 자동문인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내비게이션도 원래 자동차에 없던 기능이다. 익숙한 동네는 그냥 찾아갔고, 낯선 동네는 물어 물어 찾아갔다. 그런데 허리에 통증을 유발하면서 무거운 짐을 트렁크에 올려서 다시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래서 삶의 질이 떨어진다면, 그 불편한 시간 속에서 떨어진 생산성을 가치로 환산한다면.


롭 무어(Rob Moore)는 레버리지 LEVERAGE를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아웃소싱'하는 기술이라고 단정한다. 이 레버지의 선택 여부가 바로 디폴트와 옵션의 경계를 가리는 가치 판단이 되는 것이다.


한여름 끝자락에 우리 옆단지로 분양을 받아 온 40년 지기 친구. 집안에 모든 전자 제품들이 붙박이로, 디폴트로 설치되어 있는 아파트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 선택 자체가 옵션이었다. 냉장고, 에어컨, 김치냉장고, 전자레인지, 오븐, 식기세척기 등 이제는 일상적으로 필요해진 가전제품들.


하나하나, 물어 물어 길 찾는 것처럼 입주 앞뒤로 오랜 시간을 발품 팔고, 잠 설치고 알아보고, 출근해서도 날짜 잡고, 시간 맞추느라 조퇴하고, 조퇴하지 못한 날 쉬는 늦은 저녁에 배달되어 설치하는 그런 시간들을 모두 모아,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의 자유를 얻기 위한 옵션.


이런 옵션을 선택하는 게 사실 우리가 일하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도전)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더 오래 할 수 있는 시간을 자유롭게 확보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지금 당장, 부동산에 투자해서 거대한 수익을, 꾸준하게 올릴 수는 없지만, 내 차를 대신 운전해주는 기사님을 모실 수는 없지만.


(가능한)작은 영역에서 디폴트와 옵션의 경계를 구분하는 실천은 가능하지 싶다. 원래부터 나에게 주어졌었던 이 새벽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쓰고, 읽고, 생각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더 전략적으로, 더 체계적으로 일하고, 당신의 비전에 집중할 시간을 최대화하고, 단순 잔업과 시간 낭비를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 그로부터 레버리지는 시작된다_롭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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