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을 지나면서 부쩍 따스해진 햇살이 창(窓)을 넘어 들이친다. 오른쪽 어깨 위에서 흘러 손끝까지 한참을 주무른다.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 보라 귓가를 간지럽힌다. 파란 하늘 바다에 하얀 파도가 느릿하다. 하얀 파도를 이고 선 높고 낮은 산들도 어깨동무를 하고 출렁인다.
그 사이사이에 조금만 틈에도 인간의 작품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나도 그 어딘가에서 그렇게 한 자리 차지하고 살아간다. 오늘도 40m가 조금 안 되는 공중에서 내려오고, 공중으로 올라가 쉰다. 허공에 공간이 형성되어 나의 '집'이 되었다. 도시는 현실의 공간과 재현된 공간의 경계가 없어진 지 오래다.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생활인으로 살기 전의 어린 나의 공간은 곡선이었다. 시골길, 골목길. 불편하지만 걷는 만큼 다 나의 공간이었다. 곡선의 공간은 두 발로 걷고, 달리면서 다진, 좁지만 가장 넓었다. 꼬깃꼬깃한 주름마다 내 삶의 향기가 가득했던.
그러나 학생이 되고, 먹고사는 어른이 되면서 보고, 사고 싶고, 오르고 싶은 공간은 직선이다. 곧게 뻗어 있고, 넓고, 빠르고, 반듯하고, 책무성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개방된 공간이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사람'이 사라진 자동차의 공간, 건물의 공간은 주름진 나의 공간을 사정없이 펴주었다.
(출처:시선뉴스, 2017년 8월 8일 자)나는 오늘도 창(窓)을 통해 주름진 공간과 직선인 공간의 경계를 넘나 든다. 창(窓)을 통해 직선에서 곡선을 그리워하고, 곡선이 여전히 존재함을 매번 느끼고 싶어 한다.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그런 나의 마음을 착시 현상을 활용한 그림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져 준다.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목을 달고서.
나는 창(窓) 밖의 풍경을 보는 걸까, 캔버스 속 풍경을 보는 걸까. 여기서도 '창문'이 실마리다. 창(窓)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관습적인 우리의 인식 체계를 자극하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나의 삶에 직선과 곡선의 경계에는 수많은 창(窓)이 존재한다. 그건 결국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는 나란 인간의 모호성이다. 창(窓)을 통해 지극히 주관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창(窓) 넘어 보이지 않는 존재를 만들어 내고 욕망한다.
실개천 옆 산책로. 자전거 도로. 알록달록하고 반듯하다. 봄이 오느라 더욱 분주해진 직선이다. 주름졌던 개천을 곧게 펴 놓아 여름 한 철 거대한 하수구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오늘도 도시의 하수구를 따라 걷는다. 산책은 매일 해도, 삶의 홍수는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라 나는 무심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나의 원래 삶은 구불거리고, 느릿하고, 쉬어 갈 수 있는 주름진 공간이다. 움츠렸다 펴지기도 하고, 늘어났다 졸아 들기도 하는 넉넉한 공간. 그 공간에서는 자연스레 내가 누구인가를 스스로 들여다보게 된다.
이완이고 충전이다. 직선의 공간은 재해를 키우지만, 접혀 있고 굽어 있는 공간은 일상을 바라보면 마음에도 넓은 공간이 생긴다. 창문 밖으로 나가, 직접 걸어야만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오늘도 나는 창(窓)을 통해 나의 꼬깃꼬깃 주름진 안전한 공간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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