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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처럼 오빠를 챙기는 딸

[ 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 18

by 정원에

어제 새벽. 스무 살 하니가 보내온 사진 한 장을 보다 오래전 본 드라마가 떠올랐다. 스포츠 마케팅 회사의 대표였던 남자 주인공. 중년의 솔로인 그는 항상 슈트를 입고, 말수가 적으며 위엄이 넘친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사사롭게 고마움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외로운 리더 캐릭터였다. 그런 그가 보여주는 유일한 인간적인 모습에 부하 직원들은 당황해하며 매번 반복되는 그의 행동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바로 밥을 같이 먹을 때 아주 경건하게 행하는 '음식 사진' 찍기. 언제부터인가 회식을 하거나, 점심을 먹을 때마다 직원들은 다 차려진 밥상 앞에서 잠깐 멈춤을 한다. 그가 차려진 음식을 찍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도 말하지 않고 직원들도 묻지를 않는다. 드라마틱한 복선이었겠지만. 리더에서 잘려 강제로 쉬어야만 하는 드라마 종반부 병원 장면에서야 입원한 시한부 남편을 간호하는 엄마의 휴대폰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매번 찍은 음식 사진은 병실에 누워 있는 남편옆을 지키느라 병원밥에 의존하는 엄마한테 전송했던 것이다. 사진을 보면 엄마가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 혼자 사는 아들이 덜 걱정할 것 같아서.


그런데 이 마음이 요즘 내게 너무나도 일어난다. 엊그제 비니가 만 스물둘이 되었다. 같이 살고 있는 만 열아홉 하니가 오빠 생일상을 차렸다며 사진을 보냈다.


즉석 미역국에 계란말이, 두부 조림에 흰밥이 전부였지만 사진을 한참동안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작년 9월 추석 연휴 때 집을 떠난 후 먼저 가 있던 오빠와 함께 살게되면서 수시로 음식 사진을 찍어 보낸다. 비싸서 못 사 먹는다면서 학교 마치고 식재료를 사 들어가 (저녁은 꼭)만들어 먹는다며 보내온 음식 사진들이다.



김치콩나물국, 오므라이스, 볶음김치 참치덮밥, 바나나요거트 토스트, 감자볶음, 콩나물불고기, 계란말이, 미역국, 두부조림, 볶은 당근김밥, 고추장 떡볶이, 장칼국수, 불고기파스타.....



하니음식1.png




역할을 보니 하니가 만들고 비니가 치우기 전담인 듯하다. 나와 아내의 관계와 꼭 같다. 비니가 만들기를 시도하려면 하니가 만들겠다고 거부(?)하는 것도 꼭 같다. 성 역할의 당위성이 아니라 공정성과 자율성이 서로간에 작동하는 것 같아 좋다.


그런데 하니가 직접 만들어 먹는 음식들을 보면 익숙하다. 바로 요천이 아내 덕분에 자주 먹어 본 음식들이다. 시각, 미각, 후각이 가지고 있는 기억에 촉각을 더하고 오빠를 위한 마음을 시즈닝 삼아 끊임없이 도전하는 게 분명하다.


표현을 잘하지 않는 비니가 '이건 지금껏 먹어 본 것 중에서 좀 최고'라는 표현에 귀가 걸려 새벽에 자주 톡을 보낸다. 하니가 보낸 사진을 보고 또 보면 너무 기특하고 고맙고 대단하다. 집에서 제대로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더욱 그렇다. 결핍이 자신의 적성을 찾아 주는가 보다는 너스레조차 감사할 뿐이다.


어쩌면 '뭐 먹을까?'가 만큼 살아가면서 중요한 이슈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은) 어린 하니가 보내주는 사진 속 음식들은 단순한 끼니를 넘어, 비니는 물론 우리 둘에게 '오늘도 잘 지내요'라며 보내는 사랑과 응원의 메시지이다.


'뭐 해 먹을까?'라고 엄마한테 하는 고민이 '우리 어떻게 더 사랑을 나눌까?'라고 들리는 이유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챙기는 마음. 그리고 그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매일 새벽 가슴이 뭉클해진다.


꾸준히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의외로 많은 게 담겨 있다. 친밀하고 유대감이 만들어지고, 팀워크를 다지는 것뿐만이 아니다. 서로 잘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을 음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가르치고 배운다.


음식은 갈등을 인간적으로 풀어내는 법을 서로 제안하고 받는 비유적 장치이다. 바로 내지르지 않고 음식을 삼키면서 삭히면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허락하고, 사과하고 용서하고 기대하고 감사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매개다. '당신을 언제나 기다린다'는 희망과 사랑의 시간을 내어 주겠다는 선언이다.



"당신은 오늘,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음식을 대접하고 싶으신가요? 그 음식에 어떤 마음을 담아내고 싶으신가요?"



하니 덕분에 매일 내가 나에게 하게 된 질문이다. 한 끼를 나눠 먹더라도 습관처럼 먹지 않고, 항상 마음으로 먹기. 맛있지 않은 음식이 없는 진짜 이유다. 아이들이 내 마음을 끼니마다 더 크게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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