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이유, 뻔하지 않은 행복

[ 새벽독서; 나를 춤추게 하는 문장2 ] 10

by 정원에


삶의 이유를 늘 염두에 두며 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만 그런 건 아니더군요. 그럼에도 내가 걷는 '이 길'이 정말 내 길인지, 삶의 '방향'이 제대로 놓여 있는지는 늘 막연한 불안으로 따라다니곤 합니다. 그럴 때면 러셀의 책,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를 다시 펼쳐 읽게 됩니다.




chapter1. 그 자체로 즐거운

교실에서 만나는 10대들은 '편하게 질문하라'는 말을 가장 불편해하는 것 같아요. 여럿이 있는 공간에서는 좀처럼 질문다운 질문을 내뱉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가만 보면 10대만 그런 게 아니죠. 어른들의 회의, 워크숍, 토론 등에서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죠.


아, 그런데요. 온라인 공간에서 보면 또 그렇지만도 않죠. 익명이든 실명이든 댓글로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죠. 또 거침없이 타인의 질문에 답을 답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여럿이 있을 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기 때문입니다. 저부터 그렇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다는 건 두려움과 기대감이라는 양면성의 문제입니다. 내 질문이 어리석거나, 잘못되었을 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면서 동시에 질문으로 나를 드러낼 수 있다는 기회로 보는 거죠. 타인의 시선에 목말라하는 겁니다.


이에 대해 러셀은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단언하며, 시인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합니다.



마주치는 얼굴마다 자국이 있다

나약함의 자국이, 고민의 자국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건 자신감의 결핍에서 비롯된 허영심이 원인이라고 진단해요. 그러면서도 러셀은 '아직도 행복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우호적인 관심'(_p.57)에 그 여부가 달려 있다는 힌트를 던지면서요.


관심은 호기심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지성이 가득하고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호기심이니까요. 러셀은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정한 것이 있다고 봐요. 바로 '그 자체로 즐거운 활동'(_p.62) 의 여부입니다.


이런 활동이 많을수록 러셀이 걱정했던 '지금 여기'의 감옥에 우리 스스로가 갇혀 지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만큼 행복이 늘어날 수 있다는 의미죠. 어때요? 여러분은 그 자체로 즐거운, 어떤 활동을 하고 지내시나요?




chapter2. 희망 말고 기대

러셀은 여든이 되는 생일 즈음, 노년에 와서 꺼림칙한 결론에 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해요. 바로, 회의주의 벽에 부딪혀 고심했으며, '지식으로 통용되는 것들의 대부분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있다'(_p.13) 고 느끼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러셀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희망을 이야기할 때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많았던 자기 경험 때문이에요. 단순한 회의감을 넘어 '희망을 제시하면 화를 내는'(_p.13) 이들이 부지기수였던 거죠.


사실 지금도 주변에서 희망을 희망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던 대로', '살던 대로'라고 표현하며 희망으로부터 도피하려 하죠. 러셀은 사람들이 이러는 이유를 희망을 지키려면 '지성과 활력이 필요'(_p.15) 한데, 이게 결핍이 되어 절망에 자주 빠지기 때문이라고 봤어요.


저는 이 부분에서 희망이 아니라 '기대'를 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희망은 자연을 포함한 외부의 힘이나 은혜를 믿는데서 출발하죠. '그렇게 되면 좋지'라는 막연함에 말 그대로 희망을 거는 거죠. 어려운 상황이지만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한다는 식의 무책임한 '열망'이 희망인 것이죠.


하지만 기대는 달라요. 기대를 한 이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계획을 실천하는 과정에 자기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기대하는 것이니까요. 기대는 보통 이성적 근거나 가능성에 기반을 둡니다.


'열심히' 공부했으니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고, 프레젠테이션 직전까지 '검토하고, 또 검토'해서 디테일한 실수도 미연에 방지하려고 체크를 했으니 멋진 결과로 잘 끝날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열심히'와 '검토하고, 또 검토'하는 과정에서 기대하는 주체는 지성과 활력의 경험을 충분히 하게 됩니다.


결국, 잘 살아간다는 건 수없이 기대하고, 그 기대를 충족하게 위해 또 수도 없이 지성과 활력을 적재적소에서 발휘해 보는 성취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chapter3.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러셀을 다시 읽다가 제 눈에 번쩍 뜨이는 문장을 하나 더 발견했습니다. 바로 '시험 테크닉'(_p.144) 이 그것이죠. 수학을 사랑했던 러셀이 열한 살 때 철학을 하겠다고 선언한 계기가 되었던 단어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수많은 아이들은 수학을 접할 때 증명보다는 공리를 받아들이고, 문제를 푸는 테크닉 훈련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테크닉은 확실성을 추구했던 러셀이 물리치기 그리 어렵지 않은 유혹이었던 거죠.


그렇게 철학자의 길을 간 러셀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시점으로만 바라봐야 한다는 제약이라고 느껴졌던 겁니다. 이것이 철학을 '지금'과 '여기'의 감옥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로 확신할 수 있었던 경험이죠.


그렇기 때문일까요? 러셀은 이 세상이 늘 행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진정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은 늘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미래에 닥쳐올 수 있는 고난을 생각할 때 '당혹스러운 절망과 압도적인 공포'(_p.160) 로부터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영혼이 건강해지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에피쿠로스의 다음 말이 떠오르게 하는 대목입니다.



'젊다고 해서 철학하는 것을 미루어서도 안 되고 늙었다고 해서 철학하는 것을 피곤해해서도 안 된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너무 이른 나이도 없고 너무 늦은 나이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을 시작할 나이가 아직 되지 않았다거나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해지기에는 아직 나이가 안 됐다거나 더 이상 그럴 나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_그리스철학자열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동서문화사, p.715



아울러 러셀은 진정으로 철학을 하게 되면 지식과 기술이 증가하는 시대에서 지식과 지혜의 '균형감'을 가지게 된다고 말해요. 그가 말하는 균형감이란 어떤 문제의 핵심 요소들을 다 고려하면서도 요소 각각의 중요도를 적절하게 부여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러셀은 지식이 증가할수록 지혜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해진다고 강조하는데요, 그 이유를 지혜의 핵심이 '지금'과 '여기'의 감옥으로부터 사람들을 탈출시킬 수 있는 키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chapter4. 어떻게 늙어가야 하나

러셀은 1872년에 태어나 97세의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는 동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제자를 배출한 교육자였고, 말년에까지 지치지 않고 반전, 반핵 등의 사회 운동을 계속했습니다. <서양철학의 역사>로 1950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50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는 평을 들었던 러셀은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을 명확하게 제시해요. 역시 장수한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그 비결을 찾았다면서요. 여든 살이 넘은 뒤로 잠들기 힘들어진 외할머니가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습관처럼 대중 과학서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셨거든요.


나이를 먹고 있다는 걸 깨달을 틈을 만들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 거죠. 그러면서 덧붙어요. 갈수록 무게감이 늘어나지만 의도적으로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성장한 자녀들에게 매달리지 않아야만 그 틈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이죠.


그러다 보면 개별적인 인간 존재의 '늙음'은 강물 같아질 거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이내 좁은 강둑을 따라 흐르게 되고, 바위를 넘고 폭포 아래로 돌진하는 강물.


넓어진 강폭을 만나고 제방이 멀어지면 더욱 빠르게 흐르다 마침내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바다와 합쳐져 '아무런 고통 없이 자신의 개별적인 존재를 잃어'(_p.30) 버리는 식으로 자신의 삶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죽음의 고통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말이죠.


러셀은 1970년 자택에서 독감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일을 하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지켰습니다.




오늘 <정원에> Y


어제 서른 명 넘는 고3 아이들과 시립과학관에서 '양 뇌 해부' 실험을 진행했어요. 자유롭게 원하는 강좌를 선택해 모이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실험이 다 끝나고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난 뒤 퇴근길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아이를 만났어요.


제 수업을 듣는 '문과' 학생이었지요. 제 옆에 함께 있던 동료 과학 교사가 그 아이에게 '왜 인문학 강좌를 선택 안 하고 여기 왔냐'라고 했더니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인문학은 뻔하잖아요'.


이 글을 쓰면서 그 아이의 대답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에 대한 러셀의 질문 같은 책 제목의 의미를 처음 읽을 때보다는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는 것 같네요.


우리가 원래 '뻔한'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면서도, 그 '뻔한'것 때문에 불만족스럽고, 좌절하고, 때로는 분노하다 스스로 슬픔에 젖어들잖아요. 아까운 시간에 그런 감정과 상태에 발목이 잡힌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열아홉은 당연하고 어른이 된 지 한참인 우리도 여전히 꽤나 자주 잊어버리니까요.


러셀은 그러는 우리를 이미 간파했던 가 봅니다. 본인이 먼저 '시험 테크닉'을 배우기 싫어 수학을 포기하고 철학으로 전향하면서 '좀 더 자주 행복하고 싶다'는 명확한 인생 목표를 공표했던 걸 보면 말이죠.

이제 우리도 책상 앞에 붙여두고 마음속에 담아두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뻔한' 실천 목록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러셀의 마지막 당부에 귀 기울여 보면서 스스로 또 다짐해 봅니다.



요컨대 행복의 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능한 한 폭넓은 관심을 가질 것.

둘째, 당신의 관심을 끄는 사물들과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보다는 우호적인 반응을 보일 것.(_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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