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의 정체성은 ‘역할’이다. 그렇기에 자리는 이미 특정 역할을 기다리고 있는 인생이란 무대 위 소품과 같다.
내 자리
내가 찾아 앉은 자리다. 지금 하루 중 가장 오래 앉아 있는 그 자리를 떠올려 보자. 그곳에 놓여 있는 책상. 그리고 그 책상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의자가 내 자리다.
그렇기에 내 자리는 표면적으로는 주체적, 자율적 선택의 결과이다. 내 자리는 그렇게 자기 선택의 의지이며, 안쪽을 향한 자율의 몸짓이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고, 무엇을 바라볼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공간이다. 즉, 내 자리는 내가 선택해 머무르는 순간에 의미를 얻는 지점이다.
내 자리는 인위적이고 한시적이기에 일종의 훈련 무대이다. 오늘의 나를 드러내는 무대이자, 지금 이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허락해 주는 발판이다.
여러 역할을 한시적으로 수행하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제 자리를 발견해 나간다. 즉, 내 자리는 유동적인 변화의 자리, 의무의 자리이다.
제 자리
나를 기다리고 있던 자리다. 관계적 맥락 속에서 주어진, 운명적 질서의 결과다. 내가 앉은 공간을 돌아보면 보이는 창문과 같다.
창문은 내가 놓은 것이 아니다. 건물이 애초에 품고 있던 구조물이다. 나는 그저 그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바라볼 뿐이다.
창문은 방에 붙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상과 연결된 틈이다. 바람과 빛이 드나들고, 안과 밖을 이어주는 숨구멍이다. 나는 그것을 선택하진 않았지만, 이미 내 삶을 향해 열려 있었던 문이다.
제 자리는 이처럼 바깥을 향한 필연의 손짓이다. 내가 만든 질서가 아니라, 나를 초대한 질서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위치다.
관계 속 존재로서의 자리, 결국 인간으로서 살아야 할 자리로 내 존재를 넘어선 이야기의 큰 맥락 속에 놓인 자리이자, 내가 그 이야기에 합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좌표다.
제 자리는 나를 기다리는 운명적 위치이자 자연적 질서 속 역할이기에, 그 존재만으로도 내가 지금 서 있는 내 자리를 상대화하고 성찰하게 만다는 거울이 된다.
교차점
하지만, 내 자리와 제 자리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언제나 교차한다. 다만, 내 자리가 제 자리라고 깨닫는 찰나를 놓치거나, 순간을 잊고 살거나, 나를 잃고 살뿐이다.
그냥 해야 할 일이어서, 지금껏 한 일이라서, 그나마 잘하는 일이라서 오늘도 어제처럼 내 자리를 지켰을 뿐이더라도 그 순간, 누군가에게는 제 자리를 잘 찾아 즐기는 사람일 수 있다.
대단한 사명 때문이 아니라 내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모습만으로도 인간은 잠시 영원을 맛볼 수 있다. 그 자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제 자리로 이끄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다.
내 자리는 내가 발을 디딘 오늘의 땅,
제 자리는 내가 향해 가는 오늘의 별,
내 자리와 제 자리가 잠시 교차하는 순간,
땅과 별이 한 선으로 겹치며 나를 길 위에 당당히 세우면,
그 선을 밟고, 자유로운 의무와 즐거운 운명의 놀이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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