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부재

기록이 사라진 세계에서 생각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by Garden




은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기억 장치이다.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영원히 남는다. 한 사람의 생각이 사라지더라도, 그가 남긴 문장은 다른 시대의 누군가에게 다시 말을 건다. 그래서 문명은 말로 만들어지고, 글로 이어져 왔다.


그렇다면, 글이,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어떨까?

책은 비었고, 기록은 증발했으며 컴퓨터의 문서 파일도, 손으로 쓴 일기장도, 모두 흰 종이로 변한다. 남은 것은 단 하나, 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지만, 더 이상 기록하지 않는다. 모든 정보와 지식, 약속과 사상은 오직 말로 전해진다. 그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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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모두 자유로웠다. 글이 사라지자, 검열도 함께 사라졌다. 기록되지 않으니, 누구도 과거의 말을 증거로 삼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매 순간 자신을 새롭게 말했고, 그 말은 바람처럼 흩어졌다. 말은 더 가벼워졌고, 말하는 사람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곧, 이상한 불안이 엄습해 왔다. 어제 네가 한 말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기억은 사람마다 달랐고, 진실은 말하는 순간마다 다시 만들어졌다. 글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진실이 지속되지 않았다.


플라톤은 글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파이드로스]에서 글을 기억의 약임과 동시에 망각의 독이라고 했다. 글은 인간의 기억을 보조하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 기억하려는 능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글을 통해 생각의 연속성을 유지해 왔다.


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사유의 저장소였기에 인류는 지금껏 글을 통해 저장하고 복기했다. 글이 사라진 사회는 이 저장소를 잃은 사회이다. 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생각은 누적되지 않는다. 그 결과 인간의 사고는 깊이가 아니라, 속도에 의존하게 된다. 대화는 격렬해지지만, 사유는 얕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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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사회 인류학자 잭 구디는, 구술 문화문자 문화의 차이에 집중한 연구자 중 하나이다. 그에 따르면 구술 문화는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공동체적이고, 감정적으로 풍부하다. 반면 문자 문화는 사유의 독립성논리적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


글이 사라진 세상은 다시 구술 문화로 돌아간 사회이다. 그곳에서 인간의 지식은 기억되는 것만 남는다. 다시 말해, 기억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단지 정보의 문제를 넘어, 지식의 권력 구조를 재구성시키는 일이다.


누가 더 잘 말하고, 누가 더 설득력 있게 기억시키느냐가 그 사회의 권력이 된다. 지식은 기록이 아니라 언변카리스마에 의해 유지된다. 철학자는 논문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의 웅변으로 사유를 증명해야 한다. 진리는 논리보다 언변이 강한 자의 손에 쥐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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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부재는 예술에도 깊은 변화를 일으킨다. 문학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언어 예술은 모두 공연으로 표현된다. 시는 낭송으로만 존재하고, 소설은 구전동화가 그래왔듯 이야기꾼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얼핏 보면 원시 구전문학의 부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단절을 낳는다. 왜냐하면 예술의 본질은, 시간을 거스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글이 없는 예술은 순간에 머문다. 한 번 들은 이야기를 완전히 똑같이 들을 수 없고, 기억은 듣는 사람의 해석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예술은 반복 가능한 감동을 잃고, 대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감동으로 바뀐다. 즉, 글의 부재는 예술의 지속성을 제거한다.


지식의 전달 구조 또한 달라진다. 역사책이 비워지고, 연구 논문이 없어지면 지식은 다시 세대 간 구전으로만 이어진다. 그 결과, 사회의 진보 속도는 급격히 느려진다. 과거의 지혜를 이어받으려면, 사람들은 더 오래 듣고, 더 자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이야기들은 왜곡되고, 누군가 계산한 정확한 수치에는 오류가 생긴다. 팩트와 이야기의 경계가 사라지는 사회. 그곳에서는 역사가 다시 신화가 된다. 결국 진리논증이 아니라 서사로 설득되는 것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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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흥미로운 변화는 책임의 소멸이다. 글은 인간의 말에 책임을 부여한다. 한 번 적힌 문장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계약을 체결하기 전 구두 약속을 문서화 하는 것이나 의료 동의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문서를 작성하는 것 모두, 말한 사람이 한 말에 대해 책임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글이 사라지면 모든 즉흥적이고 일시적이게 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내가 언제?”, “그건 내 의도가 아니었어.”, “네가 오해한 거야.” 이 말이 모든 상황의 변명이 된다.


책임이 사라진 언어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신뢰를 해친다. 글이 없는 사회는 결국 신뢰 대신 반복된 말로만 유지된다. 그러나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기록이 되지 않는다. 결국 신뢰를 피로로 바뀌고, 소통의 단절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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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보면, 글의 부재는 시간의 부재와도 같다. 글은 시간을 넘나드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글을 통해 과거의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와 대화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조선왕조의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언행과 국가 운영을 기록한 덕분에, 500년 역사가 세밀하게 복원되었다.


우리는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남아 있었기에 만유인력과 고전역학의 탄생 과정을 추적할 수 있었다. 괴테가 남긴 수많은 편지와 원고가 있었기에, 그의 예술관과 시대적 배경을 세밀히 연구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기록이 남아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그들과 대화할 수 있다.


글이 사라진 세계는 곧, 이 대화의 끈을 잃어버린다. 인간은 오직 현재의 시간 속에만 존재한다. 과거의 지혜는 사라지고,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미래에 대한 예측 또한 축적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순간에 갇히고 모든 사유는 즉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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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글의 부재가 완전히 어둡지만은 않다. 텍스트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언어가 다시 몸을 되찾는다. 사람들은 서로의 표정, 손짓, 눈빛에 더 집중한다. 음성 언어는 억양과 감정의 온도를 회복한다. 의미보다는 감정이, 논리보다는 리듬이 중요해진다. 인간의 소통이 다시 예술이 된다.


글이 사라진 세상은 이해의 사회가 아니라 공명의 사회가 된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해도, 서로의 감정을 공명으로 알아차린다. 말의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감정의 진실성은 되살아난다. 문자보다는 전화가, 전화보다는 실제 대화가 진심을 더 정확히 전하는 것과 같이.


글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더 많이 잊겠지만, 그만큼 더 많이 듣게 될지도 모른다. 기억의 부정확함이 오히려 인간을 신중하게 만들고, 지식의 일시성이 인간을 덜 오만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기록이 없는 세상은 사유의 연속성을 잃는다. 유토피아는 단지 따뜻한 공명이 아니라, 차가운 기억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말은 현재를 살게 하지만, 글은 미래를 남긴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


진짜 유토피아는 글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글이 존재하되 그것이 인간을 대신하지 않는 세계다. 기록이 인간의 기억을 대체하지 않고, 말이 인간의 책임을 대신하지 않는 세계. 글과 말이 함께 호흡하는 세계. 그때 비로소 인간은, 잊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언어를 갖게 될 것이다.



유토피아 실험실 – V. 언어, 상징의 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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