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가 사라지면 우리는 여전히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개의 실험을 거치며 지각, 감정, 제도, 관계, 언어 등 삶의 구조를 이루는 많은 요소를 하나씩 제거해 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모든 요소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고 있던 하나의 축, 인과(因果)이다.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 모든 선택에는 귀결이 있다. 말에는 반응이 돌아오고, 노력에는 성취 혹은 실패가 뒤따른다. 인과는 인간 세계를 묶는 가장 원초적인 규칙이었고, 그 위에서 의미와 책임, 도덕과 목표, 희망과 후회가 생성됐다.
그렇다면 인과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인간이 무엇을 하든, 어떤 감정으로 말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고 세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세계. 하려는 행동과 일어난 결과 사이의 연결이 완전히 끊긴 세계. 이 실험은 모든 결핍 실험의 종점이자, 유토피아라는 개념이 마지막으로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다.
인과가 사라진 세상의 첫 모습은 지나치게 평온하다. 실수해도 실패하지 않고, 잘못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도전해도 성공과 실패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행동은 물결 없는 수면 위에 떨어지는 모래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행동은 그 순간으로 끝나고, 세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곳을 불확실성과 고통이 제거된, 가장 안전한 실험실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안정은 곧 인간 내부에서 다른 방식의 균열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동기는 결과의 차이에서 형성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B.F. 스키너의 행동주의 이론은 행동이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이유가 그 행동 뒤에 따라오는 결과에 있다고 보았다. 보상과 같은 좋은 결과는 행동을 반복하게 만들고, 불이익과 같은 나쁜 결과는 행동을 회피하게 만든다. 이처럼 결과는 행동을 학습시키는 장치이다.
인과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이 학습 구조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다. 행동이 어떤 결과도 낳지 못할 때, 행동은 더 이상 방향을 갖지 않는다. 이후 심리학이 연구한 자율성, 유능감, 성취감 역시 결과의 피드백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 행동이 더 이상 차이를 만들지 못하는 순간, 행동은 선택이 아니라 단순한 움직임으로 전락한다. 인간은 노력할 이유도, 포기할 이유도, 시도할 이유도 잃어버린다. 행동이 무의미해지기에, 인간은 점점 행동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이 무력화는 곧 정체성의 붕괴로 이어진다. 정체성은 선택의 결과가 누적되며 만들어진다. 우리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반복된 선택이 일정한 패턴을 남겼기 때문이다. 도전을 거듭하며 용기를 얻고, 실패를 견뎌내며 끈기를 얻고, 상처를 통해 신중함을 배우며 인간은 자아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인과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선택이 누적되지 않는다. 누적이 없으면 패턴이 없고, 패턴이 없으면 정체성도 없다. 그곳에서 인간은 ‘내가 만들어온 나’가 아니라, ‘아무것도 만들 수 없는 나’로 남는다.
도덕 역시 이 세계에서는 힘을 잃는다. 도덕은 선한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고, 악한 행동이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인과적 신뢰 위에서만 작동한다. 그러나 인과가 사라진 세계에서 선과 악은 더 이상 귀결을 갖지 않는다. 악한 행동도 상처를 남기지 않고, 선한 행동도 변화를 만들지 않는다. 그 순간 도덕은 규범이 아니라 개인적 기호가 된다. 옳고 그름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 목록 중 하나로 흩어진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인과의 부재는 존재 방식의 붕괴에 가깝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핵심 조건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다. 인간 존재는 세계를 움직이고, 세계는 인간 존재에게 반응하면서 존재의 감각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행동과 결과의 연결이 끊어진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세계와 대화하지 않는다. 세계를 움직인다는 감각을 잃은 존재는, 결국 자기 존재의 실재감 또한 상실한다. 아무리 많은 행동을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은 살아 있으되 결과와 함께 사라져 버린 존재가 된다.
하지만, 이 실험은 단순히 ‘인과의 부재는 인간을 망가뜨린다.’라는 진부한 결론에 멈추지 않는다. 인과의 부재는 동시에 색다른 가능성을 연다. 결과에서 의미를 얻을 수 없게 된 인간은, 행동 자체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무엇을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며 내가 어떤 태도를 유지하는지가 중요해진다.
이 세계에서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발생한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했듯, 행복은 외부의 성취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신념과 일치하는 순간에서 발생하는 감각으로 여겨진다. 인과의 부재는 전혀 다른 인간상을 탄생시킨다. 효과를 만드는 인간이 아니라 행동의 진실성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인간.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결핍의 끝에 다다른 인간은 정말 완전함을 향해 나아갈까? 결과 없이도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될까, 아니면 다시 인과를 갈망하게 될까? 인간은 결핍을 제거하는 순간 다시 결핍을 그리워하는 역설적 존재이다. 고통을 제거하면 성장을 잃고, 기술이 사라지면 불편함 속에서 상상력을 되찾는다.
인과의 부재 역시 마찬가지다. 결과가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결국 작은 차이를 갈망하기 시작한다. 행동이 세계를 흔드는 감각, 선택이 삶을 움직이는 감각, 말이 누군가에게 닿는 감각. 인간은 아주 작은 결과라도 그 결과가 남기는 잔향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의미 그 자체보다, 의미가 남긴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인과 없는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결과가 사라진 곳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지기보다, 자신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때 인간은 다시 인과를 설계하려 한다. 세계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세계를 대신해 응답의 구조를 만든다. 행동에 결과를 부여하고, 선택에 귀결을 연결하며, 말과 행위가 사라지지 않도록 인위적인 흔적을 남긴다. 보상과 처벌, 평가와 기록, 법과 규칙은 모두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 끝내 만들어낸 인과의 장치들이다.
문명은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효가 된 행동을 다시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 발명된다. 제도는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설계된다. 누군가의 선택이 기억되고, 어떤 행위가 축적되며,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이 서로 다른 흔적을 남길 때, 인간은 다시 자신이 세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때 인과는 더 이상 자연의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약속이며, 세계가 침묵할 때 인간이 서로에게 건네는 응답이다. 어쩌면 지금의 문명은 과거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과 없는 세계에 대한 거부이며, 제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 인간의 집단적 선언일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은 인과를 제거한 끝에서, 인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발명한다. 인과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끝내 다시 만들어내는 조건이다. 따라서 진짜 유토피아는 결과 없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실패가 곧바로 처벌이 되지 않고, 성공이 인간의 전부가 되지도 않는 세계다. 인과가 인간을 짓누르지 않지만, 인간의 행동이 허공으로 사라지지도 않는 상태.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받는 세계가 아니라, 노력했을 때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는 세계다.
인간은 결과로만 살아갈 수 없지만, 결과 없이도 살 수 없다. 우리는 완벽한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란 것은 언제나 단 하나였다. 내가 한 선택이 이 세계에 닿았다는 증거, 내가 여기 있었다는 아주 작은 떨림. 유토피아란 그 떨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곳, 그리고 그 미세한 울림 속에서 인간이 다시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세계다.
유토피아 실험실 – VI. 미래 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