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주 Jun 30. 2021

완전한 작품 뒤 불완전한 작가

[Review]연극 <'헤밍웨이(He Means Way)'>


내가 헤밍웨이를 처음 만난 것은 <노인과 바다>였다. 당시의 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로 실존주의와 관련된 작품을 찾아 읽고 있었고, <노인과 바다>는 그러한 맥락에서 추천되었던 도서였다. 실제로 읽은 <노인과 바다>는 사상적인 면모에서 여러모로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러한 작품 중간에 끼워져 있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지향하는 삶의 태도가 실존주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헤밍웨이의 이 작품은 매우 직관적이다. 우선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노어부 산티아고는 85일째 한 마리의 물고기도 낚지 못하고 망망대해를 떠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낚시도 구를 손질한다. 86일째 되는 날, 거대한 청새치기가 낚시에 걸려들게 된다. 이틀 밤을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운 후 삼 일째 되는 날 작살로 청새치를 잡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상어떼를 만나게 되어 항구에 도착했을 때에는 앙상한 뼈만 남게 되었다. 빈털터리로 돌아간 노인은 실신 상태로 쓰러져 잠드는 순간에도 그는 다음날 물고기를 잡을 생각을 한다.


이처럼 <노인과 바다>는 직관적인 소설이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상황과 비유를 사용하고, 복잡하지 않은 문장으로 글을 이끌어나간다. 작품은 주인공인 노인처럼, 겉보기에는 초로 해 보이지만 그 안의 내용은 강인하다. 특히 <노인과 바다>가 두드러지는 부분은 일반적인 이미지와 대조되는 캐릭터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 있다. 산티아고는 젊은이가 아니라 노인이며, 그의 존엄을 지키는 것도 혼란스러운 현실로부터 얻은 값비싼 교훈이 아니라 여러 경험으로 고집스럽게 지켜나가는 소명이다.


반면, <노인과 바다>를 완성한 것은 그의 주변을 떠도는 소년이다. 소년은 그가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도 아침에 눈을 비비며 나타나 아침 식사를 대접하고, 그를 위해 낚시 미끼로 사용할 정어리까지 채워준다. 그가 그는 85일 동안 물고기를 낚지 못한 산티아고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소년은 늙고 불운한 노인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노인을 바라보며 소년이 흘리는 눈물은 애틋하기까지 하다. 노인은 물고기와 필사적인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그를 떠올린다. 노인과 소년의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묘한 감동을 준다.


작가는 자신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글로 노출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도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상상한 헤밍웨이는 위대한 투우사이자, 인간의 유대관계를 찬미하는 작은 인간 중 하나였다. 노인의 쭈글쭈글하고 억센 팔과, 고상하고 자존심 센 사자의 꿈은 작가가 그린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극 <'헤밍웨이(He Means Way)'>는 낯설었다. 연극에서 표현되는 헤밍웨이에게서는 극기를 지향하는 인간의 의지도, 작은 소년이 주는 영감과 에너지로 내일 낚을 고기를 상상하는 소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투우사처럼 삶을 맞서기는커녕 자신이 흩어놓은 원고들이 만들어낸 거짓된 세계를 견고한 성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헤밍웨이를 맡은 배우는 취한 사람처럼 코를 빨갛게 분장하고 등장한다. 배우는 목소리가 크고 강한 어투로 이야기하지만, 시선 처리가 분산되도록 연기했다. 실제로 연극 내내 헤밍웨이의 태도는 일관적이지 않고 불안하다.


산울림 영미 고전극장의 첫 번째 작품인 <헤밍웨이>는 헤밍웨이가 자살하기 직전의 이야기를 다룬다. 연극은 헤밍웨이가 겪었던 사건과 인물들이 뒤죽박죽 섞인 상태로 전개된다. 연극의 그러한 전개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헤밍웨이의 주마등'으로 받아들였다. 반대로, 이 작품에서 등장한 인물과 상황은 그의 방식대로 재해석된 것들이다. 그래서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냉정해 보이고 거침없다.


그래서 이 작품은 헤밍웨이가 죽음 직전에 느끼는 죄책감과 후회, 슬픔으로 얼룩져있다. 하지만 작품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헤밍웨이의 삶을 꾸며내려 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헤밍웨이는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드러낸다. 처음 감상했을 때에는 정신이 어벙했는데, 곱씹을수록 작품의 전개방식은 헤밍웨이의 고독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한 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끝 앞에서 우리는 끝에 다다르는 과정을 다시 떠올린다. 헤밍웨이 역시 자신이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숨겨왔던 것들이 자신의 삶을 파괴한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연극이 시작하자마자 여장을 한 헤밍웨이의 아들이 등장한다. 아들 그레고리는 그가 작품 속에서 지향한 가치와 그 자신의 삶을 괴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실제로도 그레고리는 아버지가 지향했던 남성성의 피해자였다. 그레고리는 젊은 시절 아버지가 지향한 남성성에 쫓기듯 사냥을 즐기고 전쟁에도 참전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극단적인 남성성에 쫓겨 행복하지 못했다. 그레고리는 말년에는 자신의 성기를 자르고 여성의 삶을 살아가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레고리는 헤밍웨이 그 스스로 억압해온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헤밍웨이는 일반적으로 마초적인 남성관으로 유명한 작가였다. 그는 진정한 남성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실제로 사냥꾼이자 종군기자, 군인으로서 남성적인 활동을 즐겼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활동을 하며 명성도 얻었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그의 삶은 늘 불완전했고,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끔찍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가 지향한 남성성이 그의 삶을 파괴한 것이다.


정확히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불안정한 양육태도를 고수한 부모님과 가정환경이 그의 왜곡된 성 관념에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헤밍웨이가 여성혐오주의자가 된 이유로는 자주 그의 어머니가 언급된다. 실제로 헤밍웨이와 헤밍웨이의 어머니는 사이가 아주 나빴다. 어머니는 아들을 혹평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그가 쓰는 소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헤밍웨이는 그의 어머니를 남을 조종하려고 하는 사람으로 표현했다.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남성적이었다. 하지만 때로 헤밍웨이를 돌보았다. 헤밍웨이는 그 아버지의 삶을 지향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자살하고 만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었던 헤밍웨이도 자살로 생을 끝마친다. 연극에서는 헤밍웨이 스스로가 총구를 당기지 않고, 그레고리에게 당기라고 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살을 실행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무게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연극의 이러한 연출이 아주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의 헤밍웨이는 그가 지향한 진정한 남성, 지치지 않고 삶을 헤쳐나가는 인간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의 상상 속에서 마지막까지 그는 그 자신에게 총탄을 당기지 않는다.


연극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노인과 바다의 장면이 삽입된 후 장면이 끝난 후에도 배우들이 퇴장하지 않는 점에 있다. 산티아고와 소년은 아무런 표정없이 뒤에서 헤밍웨이를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산티아고의 의지는 그가 뒤집어쓴 '진짜 사나이'의 가짜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괴리가 헤밍웨이의 삶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앞서 기술했듯이, 소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지향한 가치, 가장 아름다운 자화상이자 그가 그린 가장 견고한 성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 자체를 여성혐오의 결과물로 분석하고 싶지는 않다. 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조금 치우쳐있긴 하더라도 한 인간의 갈망이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괴리가 있다곤 하지만, 성실하고 포기를 모르는 남성 산티아고는 이미 충분히 늙고 쇠약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안에는 놀라운 감수성이 숨겨져 있다. 산티아고는 그가 여성이라고 표현한 자연과 동화되길 바라고, 가장 고통스러울 때 소년을 그리워한다.


소년은 그의 이전 작품에서 등장한 여성과 비슷한 구실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소년이 헤밍웨이가 지향한 남성우월주의 때문에 등장하였다고 분석하고 싶진 않다. 소년은 늙은 노인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말년에는 만족스러운 성과물을 얻지 못했던 헤밍웨이한테는 그러한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의 거짓된 성을 견고하게 지키고 응원하는 존재가 말이다. 소년은 감상적이고, 남을 돌볼 줄 안다. 하지만 사실 소년 역시 헤밍웨이의 또다른 페르소나였을 것이다.


소설 노인과 바다가 아름다운 작품이긴 해도, 헤밍웨이의 배경을 안 후 감상한 '강력하고 성실한 남성'인 산티아고의 이미지는 어딘가 구슬픈 점이 있다. 노인은 지친 몸을 이끌면서도 사자의 꿈을 꾼다. 끝없이 투쟁하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 반대의 가치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끔찍한 면모가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헤밍웨이는 자살을 결심하는 그 순간까지 사회와 그 자신이 덮씌워놓은 남성성의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단순히 작가를 둘러싸고 아들, 전우, 두 번째 아내, 어머니, 아버지가 둘러싸는 것이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러한 연극적 장치가 마음을 불편하게 한 점은 있긴 했지만, 연극이 정말 고발에만 목적이 있었다면, 헤밍웨이가 말년에 완성한 작품인 노인과 바다를 그런 방식으로 끼워놓진 않았을 것이다. 중간에 삽입된 '노인과 바다'는 작품이 그러하듯, 혼란스러운 마음속에서 떠오른 작은 섬 같다.


그래서 나는 극단이 정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고발 이상에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다만 이 작품은 나에게 이상한 감상을 느끼게 했다. 헤밍웨이가 마침내 완성한 걸작은 그만의 외상과 수많은 사람의 피가 완성했다. 작품은 아름다운데, 정작 그 아래에 깔린 상념들은 그의 작품처럼 아름답지 않다. 어쩌면 그의 안에서 가장 갈구했던 해답이 작품을 통해 고개를 내민 것일지도 모르겠다.


관람객들은 헤밍웨이의 삶과 그의 작품의 괴리를 보면서, 작가와 예술작품, 그리고 관람객 감상들이 불편하게 어우러짐을 느끼게 된다. 작품을 모두 감상하고 돌아가는 길에, 헤밍웨이가 그 안에 숨겨진 그 감상적인 부분을 억압하지 않고 살아갔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그는 말이 지나치게 많은 작가인 동시에, '남성성', '여성성'이 유령처럼 떠도는 시대의 희생자였다.




작가의 이전글 생명의 나무에서 돋아난 한 뼘의 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