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들길」 책 속에서 인용된 긴 구절이 소환해

Philosophical Psychologist 나의 고향 을지로

by 지경선

을지로, 나의 들길


하이데거에게 들길은 고향 메스키르히의 숲과 계절이 겹쳐진 사유의 자리였다. 보리수와 십자가, 아침의 농부 발걸음과 저녁의 정적 속에서 그는 존재의 물음을 길어 올렸다. 들길은 철학이 태어난 토양이었다.


나에게는 을지로가 그렇다. 숲길은 아니지만, 골목마다 어린 날의 시간이 켜켜이 묻어 있다. 정다방과 향운다방, ㅇㅇ네 집, 쌀집 ㅇㅇ 네 집, 국수집 할머니, 그리고 종이가게들… 중학교 3학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내 삶의 가장 첫 장면들은 늘 을지로의 빛과 냄새 속에서 열렸다.


을지로의 골목은 나의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모여 다방구를 하며 골목 어귀를 달리고, 오징어 게임 판을 그려놓고 진지하게 승부를 겨뤘다. 술래잡기를 하다 보면 어디선가 백발뛰기 하는 소리가 나고, 자전거는 골목의 굽은 길을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작은 몸이었지만, 그 안에서 세계는 무궁무진하게 펼쳐졌다. 나는 그곳에서 웃고, 울고, 꿈꾸며 자라났다. 그 기억들이 지금의 내 뼈와 살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 거리는 달라졌다. 낡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공사장의 펜스와 크레인이 하늘을 가른다. 익숙했던 풍경이 무너져가는 광경은 때로 허무하게 다가오지만, 나는 그 앞 카페에 앉아 햇빛을 쬐며 과일주스를 마신다. 변해버린 거리를 마주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은 편안하다. 공사장의 굉음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다. 오히려 그 잔해 위에서, 나는 더 깊이 나를 마주한다.


을지로는 내게 정서적 안정의 자리다. 대도시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나는 이곳에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걷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하며, 그저 그 시간과 함께 머무른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들길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시골의 오솔길에서, 어떤 이는 산사의 고요한 마당에서, 또 어떤 이는 내게처럼 도시의 오래된 골목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난다. 중요한 것은 길의 모습이 아니라, 그 길이 내 마음을 어떻게 비추는가이다.


을지로는 내 고향이다. 지금은 건설 중인 현장이지만, 나는 그곳을 바라보며 사유한다. 사라진 것들과 남아 있는 것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삶이란 결국 무너지고 세워지는 과정을 겹겹이 견뎌내는 일이라는 것을. 어릴 적 다방의 웃음소리와 지금의 콘크리트 굉음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둘 다 내 삶의 리듬으로 남아, 나를 지금의 나로 빚는다.


하이데거는 들길을 따라 걸으며 “세계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을지로의 골목에 앉아,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그 순간 속에서 내 삶의 소리를 듣는다. 변하는 도시는 무심히 흘러가지만, 나에게는 그곳이 여전히 사유의 길이고, 내면의 고향이다.


다방구와 오징어 게임, 술래잡기가 세상을 열어주던 작은 골목|햇빛에 기대어, 오늘도 나는 을지로에서 나를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