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글방
서울식물원의 한켠, 싸리꽃이 피어 있었다.
보랏빛 작은 꽃들이 가지마다 조용히 흔들리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유년의 새벽이, 그 싸리꽃 향기와 함께 나를 덮쳤다.
그 시절, 우리 집의 하루는 싸리비 소리로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마당을 쓸었다.
“마당을 깨끗이 쓸어야 복이 들어온다.”
그 말씀은 아버지의 하루를 여는 주문이었고,
삽짝(싸리대문)을 열고 들리는 그 쓱쓱— 싸리비질 소리는
우리 가족의 아침 종소리였다.
아버지는 늘 부지런하셨다.
마당을 다 쓸고, 길 앞까지 깨끗이 쓸고,
그제야 지게를 지고 소꼴을 베러 나가셨다.
그 모습은 언제나 단정했고, 그 소리는 어떤 음악보다도 따뜻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몰랐다.
그 부지런한 손끝 뒤에 얼마나 긴 세월의 고단함이 숨어 있었는지.
아버지는 아홉 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하셨다.
할아버지가 병을 얻으시자, 장남으로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동네에서 천석꾼이라 불리던 고모할머니 댁에서 머슴을 사셨단다.
고모할머니의 아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동갑내기였던 아버지는 삽을 들고 새벽부터 밭을 갈았다.
그 어린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시리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부모님을 봉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다.
아버지는 진정한 ‘사형제의 장남’, 가족의 기둥이었다.
그 후엔 돈을 더 벌기 위해 만주로, 그리고 일본으로 가셨다.
일본 탄광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번다는 말에
스스로 지원해 탄광에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붕괴 사고가 일어나
15일 동안 땅속에 갇혀 계셨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들었다.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셨지만, 위의 대부분을 잃고
평생 위통에 시달리셨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아버지가 늘 배를 움켜쥐고 소다를 삼키시던 이유를 몰랐다.
그렇게 아픈 몸으로도 아버지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고향으로 돌아와 동생들의 혼사를 챙기고,
집과 논을 떼어 주며 제급을 내어주셨다.
그 모든 세월을 오로지 ‘책임감’ 하나로 살아내신 분이었다.
그 성실함 덕분이었을까.
1960년대, 가난한 시절에도
아버지는 전주시장상을 두 번이나 받으셨다.
그 시절엔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남에게 자랑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새벽마다 싸리비를 들고,
복이 들어온다고 믿으며 마당을 쓸 뿐이었다.
이제는 싸리꽃도, 싸리비질 소리도
시골 어디에서도 듣기 힘들다.
그러나 그 싸리비 소리는 여전히 내 마음의 새벽을 두드린다.
싸리꽃 앞에 서면
그때의 냄새, 그때의 바람,
그리고 싸리비 끝에서 들려오던 아버지의 부지런한 호흡이 다시 들린다.
싸리꽃이 흔들리는 이 가을,
나는 또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그 싸리꽃 향기 속에서,
아버지의 삶이 내 가슴 속에 슬픈 꽃으로 다시 피어난다.
참, 시린 가을이다.
https://youtu.be/9kkfLDk0DjI?si=bPerEGivA40IbQ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