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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사진 찍은 날

by 이가연

'빠가야로.. 일정이 있었잖아.'

어제 점 뺐다. 아... 이런 거 안 해봐서 이런지 몰랐다. 얼굴이 완전 무슨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내일모레까지는 그럴 예정이다. 그런데 오늘 캘린더에 무언가 적혀있었다. '뭐야 이거?' 뭔지도 잘 모르고 일단 갔다. 어쨌거나 사람 '감정'을 다루는 워크숍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런 거 좋아한다. 감정, 심리, 정신 의학.

그냥 일정이면 모자 쓰면 끝이다. 어차피 항상 화장은 안 한다. 그런데!! 오늘 일정은 다름 아닌 흑백 사진을 찍는 거였다. 장소에 도착하니 정말 사진관처럼 조명에 의자가 있었다. 두둥.

'아, 망했네.' 싶어서 솔직하게 오픈했다. 어제 점 빼서 내가 원래 일반인 모델로 스냅사진도 많이 찍어봤는데, 지금 처음으로 사진기 앞에서 위축된다고. 점만 문제가 아니라, 왼쪽 볼에는 뾰루지도 나있다. 마카오 때문이다. 해외만 가면 뾰루지가 생긴다. 영국에서는 뾰루지가 없던 하루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어지간해선 얼굴이 깨끗하다. 영국에서 맨날 중국인들에게 피부 좋다고, 한국인들은 왜 다 피부 좋냐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마디로 오늘 얼굴 상태가, 인생에서 다시없을 최악의 상태였다. 그런데 사진을 찍어야 한다니. 상당히 멘붕이 왔다.

예상했던 것처럼, 감정을 다뤘다. 돌아가면서 문답지에 오늘의 감정, 내가 끌어안고 싶은 부정적인 나의 마음 같은 걸 적었다. 나는 성급함을 얘기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 점 뺀다고 하면, 그게 아픈지, 회복 기간이 걸리는지, 뭐 기타 등등 알아볼 거 아닌가. 언제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나는 혈점이 이마에 생겨서, 엄마가 그거 커지기 전에 빨리 빼라고 해서 예약 잡았다. 실행력과 적극성은 항상 훌륭한데, 이렇게 뭔가 약간 '아....' 싶은 순간들이 꼭 달라붙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늘 워크숍에 딱 맞았다. 그게 내가 끌어안아야 할 부정적인 나의 모습 아닌가. 남들보다 적극적이고, 실행력이 좋다는 건, 그만큼 성급하고, 충동적이고, 두 번 생각 안 해서 실수 생기기 쉽다는 뜻이다. 어이, 받아들여. 생각만 하고 못하는 거보다 백 배 낫다고 생각하잖아. 몇몇 세상 사람들 겁나 답답하다고 생각하잖아. 그렇다면 이면을 받아들여라.

사진 찍을 사람이 나 빼고도 더 있고, 한 사람당 길어야 5분 주어질 거 같았다. 사진을 많이 찍어봐서 안다만, 한 촬영에 약 2시간 동안 200컷을 찍으면 처음 30분 최소 50컷은 완전 날린다. 그래서 가장 최근 덕수궁 스냅에 갔을 때에도, 제일 좋은 스팟인 석조전은 나중에 가도록 동선을 생각했다. 처음엔 별 배경 없는 데에서 편하게 표정 풀어야 된다.

전문 모델도 아니고, 처음에 매번 카메라와 낯 가린다. 처음 50컷과 끝에 50컷은 천지 차이다. (사실 그건 그냥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첫 만남에도 대화한 지 1-2시간 지나면 다른 사람이다.) 익숙한 사진사님과 찍어도 그런데, 처음 만나는 작가님에 뒤에 모르는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으면 오죽한가.

그래도 순간 마음을 다잡았다. 분명 점 뺀 스티커는 다 뽀샵해 주신다고 했고, 나는 그냥 표정만 잘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 얼굴에 스티커들 때문에 위축되면 표정이 안 풀려서 결과물이 좋지 못하다. 표정이 마음에 안 들면 그건 아무도 못 도와준다.

그래서 내가 알아서 표정이 자연스러우려면 말을 계속해야 할 거 같다며 갑자기 오늘 꿈에 첫사랑이 나온 썰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순간 눈동자가 맑아지고 표정이 풀리는 순간이 있지 않겠나. (진정한 ADHD다. 순간 판단력 빠름과 아무 데서나 사적인 얘기 술술.)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표정이 밝은 걸 작가님이 찍으시면 좋겠다고 판단한 건데, 순간적으로 간밤에 꿈이 떠올랐다. 다른 얘기도 많겠지만, 오늘 잠을 설쳐서 마침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다. 내가 '첫사랑'이라고 하니까 뒤에 계신 분들이 '일동주목'하신 거 같아서 얼른 중3 때 얘기라고 했다. 오늘 꿈이 좀 남달랐다.

옷도 크게 생각 안 했다. 이 학교 티는, 원체 내가 옷 고르는 걸 도대체 왜 신경 써야 하는지 모르겠는 스티브 잡스 꿈나무라 색깔만 다르게 3벌 산 것 중 하나다. 겨울 내내 이거만 입으려고. 그런데 단순히 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재학생 때였든, 졸업생인 지금이든, 학교에 대한 애정 높은 걸로 백 명 중에 1등일 것 같다. 뭐, 이것도 애증이란 말이 맞다만. 애정이 깊어야 그만큼 서운해서 복합적인 감정이 생긴다.

학교를 위해 쏟았던 열정 때문이다. 비록 음악학부는 너무 학생을 방치하고 무책임했지만, 열심히 뛰었던 그 내 모습이 내가 봐도 예뻤어서. 그 학교가 내 인생의 마지막 학교가 될 거라는 생각은 작년이나 지금이나 전혀 없다. 그렇다한들, 내 첫 대학원임은, 첫 유학임은 앞으로도 변함없다.

그래서 큰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이 옷을 입고 나온 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워크숍이 만족스러워서 다음 주 토요일에도 다른 체험을 예약했다. 다 무료다. 올해 여의도에 이사 온 이후로, 영등포 네이버 카페를 통해 이런저런 재미난 이벤트에 참여했다. 이래서 아는 게 힘이다. 서울에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재미난 이벤트가 무진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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