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일 시절부터 나는 장기기증에 대해 생각해 왔다. 하지만 선뜻 "나 장기기증 신청할래!" 하고 쉽게 내던질 말이 아니라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나 보다. 마음속으로 생각만 해왔지 선뜻 신청을 하는 방법이라던지, 가족들에게 의사를 묻는 용기 따위는 내지 못했다.
처음 장기기증에 대해 말을 꺼내기 전 부모님이 들으시면 좋아하실까? 내가 부모 된 입장에서 내 자식 배를 갈라 남에게 준다 하면 그게 좋을까?라고 거듭 생각되어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헛소리 말라고 야단치시진 않을까? 우리 엄마 성격에 등짝을 흠씬 두드려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밥을 먹는 자리였다. 수차례 고심 끝에 "나 장기기증 신청할래. 신청은 내 의사지만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실제로 행해지지 못한데. 의사 표현하는 거야. 일단 신청해 둘게!"라고 폭탄 던지듯 투척하는 말에 아버지는 "그래, 그래라."라고 답하셨다.
'응..? 이렇게 쉽게 허락이 된다고?'
내가 이제껏 걱정했던 건 괜한 걱정이 되었고 흔쾌히 그래라라고 하시는 아빠 말씀에 허무했다. 그 뒤에 아빠는 "네가 고민하고 뱉었을 거라 생각한다. 도둑질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나누고 기증한다고, 좋은 일 한다는데 게다가 내 몸도 아니고 네 몸인데 네가 결정했으면 그런 거지 뭐."라고 하셨다. 나의 고민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맞다 기증은 좋은 일인데 왜 쓸데없이 걱정했을까.
아버지와의 대화가 있고 며칠 뒤 인터넷 검색창에 장기기증 신청방법을 검색해 봤다. '국립 장기 조직 혈액관리원'이라는 기관 사이트가 있었고 온라인으로도 쉽게 신청이 가능했다. 하지만 뭔가 모를 두려움에 사이트 구경만 하다가 인터넷을 껐다.
2020년 5월 지병이 있으시던 아빠는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가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시며 급격한 병세 악화로 중순께 돌아가셨다. 화장을 하고 납골당에 안치해 드리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장기기증을 결심했다. 그렇게 당당하시던 아빠가, 너무 든든하던 아빠가 한 줌 재가되어 도자기 속에 갇힌 채 삶의 끝을 맺다니 허무했다. 허무함, 공허함, 매울 수 없는 빈 공간이 무한으로 다가와 나를 덮치는 듯했다. 어차피 재가되어 다 타버릴 육신이라면, 죽은 뒤엔 나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그저 몸뚱이라는 물체라면 장기를 기증해야 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훝날 죽고 난 뒤 나에게는 한낱 몸뚱이 속 부속품에 불과한 것들이 누군가에겐 더없이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다. 누군가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스케치만 그리던 생각들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며 꿈틀거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비로소 확실한, 확고한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남편이 된, 그 당시 남자 친구에게도 말했다.
"나 장기기증 신청할 거야 대신 네가 내 보호자가 될 테니까 너의 동의가 있어야 기증할 수 있어.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내 의사를 말해둬야 나중에 내 보호자로서 결정해야 할 날이 있을 때 너의 결정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해두는 거야. 대신 안구는 빼고 해도 돼. 기증된 채로 마지막 인사를 나눌지도 모르는데 징그러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아."
라고 웃음기 없이 말하니 남자 친구는
"알겠어. 하지만 네 말처럼 어떤 상황일지 모르니 난 최대한 너를 기다릴 거야."
라고 답했다. 가끔 tv 드라마나 영화 기적 다큐 같은 장르에서 뇌사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난 사람들을 소재로 이야기하곤 하니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충분히 고민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아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장기기증을 결심했고, 다음날 노트북을 켜서 '국립 장기 조직 혈액관리원"에 접속해 기증 신청을 했다. 신청 후 며칠이 지나니 기증 안내서와 신분증에 부착할 수 있는 스티커, 기증증등이 우편물로 도착했다. 신분증에 스티커를 붙이고 지갑 제일 앞쪽 잘 보이는 곳에 기증증을 꽂아 넣었다. 뿌듯했다. 그런 나를 보며 남자 친구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비췄다.
"걱정 마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해서야. 만약에 내가 사고로 뇌사 상태가 되면 그때를 위해 해 둔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하니 못 말리겠다는 듯 걱정의 눈초리를 거뒀다.
기증 신청을 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랜 시간 생각해 온 일을 이뤘다는 성취감도 들었다. 가뿐했다. 내가 내 몸을 온전히 다 사용하고 떠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인생은 언제나 우여곡절이 있고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기에 혹시를 대비해 마련해 둔 내 인생여행 종점지 중 차선책이다.
사람으로 왔다가 한 줌 재로 가는 인생이라는 여행 속에서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온전히 제 삶을 아쉬움 없이 즐겼습니다. 후회 없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여행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분들께 도움이 되기 위해 기증을 결심했습니다. 부디 제 뜻을 헤아려주시길 간곡히 바라며 글을 남깁니다. 여러 곳에 도움 된 사람으로 기억되며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