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감자를 애정하는 이유.
이번 주말, 외할머니댁으로 여름휴가를 간다는 말에 일주일 내내 들떠서 신나 있었다. 한 번도 뵌 기억이 없지만 멀리 여행 간다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뒤집어 놓았다.
외할머니댁은 전라도 진도에서 배를 타고 20분쯤 더 들어가면 나오는 조도라는 섬이다. 부산에서 조도까지 가는 게 쉽지 않은 여정이기에 엄마는 할머니를 자주 뵙는 걸 포기했다. 사는 게 바빠서, 거리가 멀어서 이런저런 핑계로 친정에 찾아뵙지 못한 게 7~8년은 되어간다고 들었다. 그 먼 길을 어린 나를 데리고 처음으로 여행겸 안부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엄마와 아빠는 짐을 챙겨 차 트렁크에 싣었다. 5시간은 족히 걸릴 먼 여정이었기에 안 그래도 손이 큰 엄마는 새벽부터 이것저것을 챙기셨다. 어린 마음에 나는 트렁크가 꽉 차서 터지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차가 달리다가 짐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애써 추켜올렸다. 여행의 첫 시작을 잠든 채 지나쳐버리기 아쉬웠기에 밀려오는 졸음을 애써 쫓아내려 했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오려 하자 엄마가 운영하시는 화장품가게 앞에 a4용지에 굵은 매직으로 아빠는 [00/00 ~ 00/00 여름휴가 다녀옵니다.]라고 써 붙이셨다. 비로소 우리 가족은 차에 몸을 싣고 출발할 수 있었다.
생애 첫 장거리 여행이라는 기대감에 출발해서부터 도착할 때까지 절대 잠들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했지만 애석하게도 새벽 일찍 눈을 뜬 나는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요람 삼아 10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햇살이 눈을 떠보라며 재촉하는듯한 밝은 눈부심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뜨니 넓은 도로에 굉장한 속력을 내며 우리 차는 달리고 있었다. 생애 첫 속도감에 신이 나서 눈을 뜨자마자 신난다고 소리를 질렀다가 엄마에게 등짝을 한대 얻어맞았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보였던 건지 아빠는 차 내부의 거울을 통해 나를 쳐다보며 빙그시 웃어주셨다.
등짝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찌뿌듯함을 느꼈다. 좁은 차에 가만히 있으려니 온몸이 뒤틀리는 듯했다. 장거리 여행도, 고속으로 달리는 차도, 장시간의 자동차탑승도 전부 처음이었던 나는 지루함과 찌뿌듯함의 콜라보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아빠도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잠시 쉬었다 갈까?" 하고 물으셨다.
우리 차는 점차 속력이 늦춰졌고 갓길로 들어서더니 빙글빙글 돌아 굉장히 큰 건물 앞에 세워졌다. 잠시 쉬었다 간다는 말에 계곡이나 바다, 푸른 숲이나, 동물을 기대했던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주 큰 차들도 많고 우리 차랑 비슷하게 생긴 차들도 많았다. 버스도 여러 대 보였던 그 주차장은 어린 내게는 너무도 삭막해 보였다. 기대와 다른 모습에 입이 삐쭉 나왔지만 애써 삐진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랬다간 또 엄마에게 등짝을 내어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차에서 내리니 뜨거운 햇볕에 땅이 녹는듯했다. 저 멀리 땅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건물 쪽으로 다가서니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다들 손에 먹거리를 잔뜩 쥐고 먹거나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좌판대가 널려있었고 할머니가 자주 듣던 트로트도 시끄럽게 틀어져있었다. 엄마는 먼저 화장실을 다녀오자고 하셨다. 도로중간에 이렇게 큰 건물이 있고 건물 주변으로는 나무밖에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이곳에 사람들이 작은 마을을 만들어 놓고 산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을 다녀와 보니 그제야 맛있는 냄새들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시원한 슬러시를 먹고 있는 또래 친구를 보고 엄마께 슬러시를 사달라고 졸랐다. 웬일인지 엄마는 흔쾌히 슬러시를 사주셨다. 아빠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가시더니 감자와 오징어, 떡볶이를 사 오셨다. 맛있어 보이는 떡볶이를 한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으니 아빠는 내게 감자를 건네셨다.
'집에서 엄마가 아무리 많이 쪄줘도 잘 먹지 않는 감자를 이렇게 놀러 와서도 먹으라니! '
먹기 싫다고 했다. 아빠는 그러지 말고 한 입만 먹어보라고 했다. 아빠의 부탁에 못 이기는 척 감자를 한입 베어 물고 오물오물 씹었다. 그 순간 나는 당황했다. 이것은 내가 그동안 알던 감자의 맛이 아니었다. 겉은 바삭한 느낌에 속은 부드러웠다. 달콤하고 짭짤한 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게 과자 같은 느낌이었다.
"우와.."
감자를 한입 베어 물고 내뱉은 나의 감탄사에 엄마아빠는 나를 보고 그저 웃으셨다. 배부르게 감자와 떡볶이, 오징어까지 다 먹어 치웠다. 슬러시까지 다 먹은 뒤에 다시 화장실에 다녀오니 이제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아빠가 말씀하셨다. 잠시 쉬었다 가는 걸 계곡이나, 숲, 바다, 동물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면 후회할 뻔했다고 생각했다. 차에 타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내 물음에 아빠는 이곳은 휴게소라는 곳이고 고속도로 중간중간에 있는 편의시설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내겐 별천지 같은 이곳의 이름은 휴게소였다. 그 뒤로 할머니집에 가는 내내, 할머니 집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아빠한테 휴게소에 가자고 졸라 댔다. 여름휴가가 끝난 뒤에도 종종 나는 엄마 아빠를 붙잡고 휴게소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나는 등짝스매싱을 맞고 나서야 휴게소 타령을 멈출 수 있었다. 가끔 가족여행 중에 휴게소를 들릴 때면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르곤 했다. 나이가 든 뒤에도 사춘기가 와서 여행이 귀찮아진 뒤에도 휴게소는 내게 신나는 장소로 기억되었다.
얼마 전 친구 결혼식을 맞아 인천으로 장거리 여행을 하게 되었다. 4개월 된 딸과 함께하는 첫 여행이었기에 굉장한 긴장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유모차와 기저귀가방 이런저런 짐과 분유, 젖병, 소독기구등을 다 챙기니 트렁크 한가득 짐을 싣고 출발했다. 가는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러 아기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았다. 잠시 내려 아기와 함께 산책도 했다. 차에서 내려 건물로 가까이 가자 여전히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각종 음식 냄새들이 코를 간지럽혔다. 남편은 핫바를 먹고 싶다고 했다. 내게 무엇을 먹을 거냐고 물었다.
"알감자!"
어릴 적 추억을 생각하며 알감자를 사 와 달라고 부탁하고 휴게소 밖에 설치된 밴치에 아기와 앉아 남편을 기다렸다. 따스한 햇살, 솔솔 부는 바람. 멀리서 들려오는 트로트 노랫소리. 괜스레 옛 생각에 코끝이 시큰거려지는 듯했다. 엄마 아빠와 떠났던 첫 여행의 기억이 나를 온전히 덮쳐 눈시울이 붉어지기 직전에 남편은 알감자를 사들고 내게 왔다. 설탕과 소금을 한껏 뿌려 감자 위엔 소복한 눈이 쌓인듯한 모양새였다. 한 입 베어문 감자는 여전히 내 기분을 포근하게 만들어줬다. 그때 그 맛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때의 맛이 아닐지도 몰랐다. 추억과 함께한 그 맛이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우리 아기가 오늘날의 휴게소를 기억할까?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딸에게도 이런 포근한 기억을 새겨주고 싶다. 내가 첫 휴게소를 들렸을 때의 그 포근함을 잊지 못하고 커서도 휴게소만 들르면 미소가 지어지는 것처럼 나도 우리 아이에게 행복한 추억을 심어주고 싶다.
코끝에 스치는 알감자의 버터향이 포근한 느낌을 가지는 다소 이색적인 조합을 나는 애정한다. 엄마 아빠손을 잡고 첫 여행에 입을 빼쭉 내밀며 투정 부리던 어린아이는 이제 남편과 딸의 손을 잡고 한가정의 엄마가 되어 여행을 한다. 휴게소가 내게 준 아련한 감정이 마음을 간지럽혀 아이와의 첫 여행을 더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줬다. 딸아이가 기억하는 첫 휴게소도 내가 가진 추억처럼 포근하고 몽글거리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