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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가영 Nov 13. 2023

반짝거리는 시절 인연

  오랜만에 대학시절 친구를 만났다. 현재 임신 중이라 음주 가무를 즐기지 못하는 나는 술 좋아하기로 소문난 우리 대학 동기들을 임신기간 내내 잘 만나지 못했었다. 임신 8개월 차, 드디어 술 없이 낮에도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고 낮에 시간이 나던 친구를 찾던 중 최근 이직을 했다는 대학 동기를 만나게 됐다. 임신 전엔 자주 만나 대화도 많이 나누고 생각 없이 놀기도 했던 여러 추억을 공유한 친구인데 서로 사정이 바빠 만나지 못하다가 임산부라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내가 몇 번의 구애를 청하고서야 친구의 휴무에 맞춰 토요일 오전 브런치 약속을 어렵사리 잡을 수 있었다.


 오랜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익숙한 듯 우린 인사를 주고받고 그간 못 나눈 근황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를 못 만난 사이 그 친구에겐 속 시끄러운 사건이 있었다며 말을 시작했다.

 최근 우연히 알게 되어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친구도 모르는 사이에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남편에게 외도사실을 들킨 언니는 뜬금없이 친구가 소개해 줬다고 변명을 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모르던 친구는 화가 나서 걸려온 언니 남편의 전화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억울한 상황에 놓여 몇 달간 혼자 끙끙 앓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인가 보더라. 너를 안 만난 사이에 잠시 시절 인연으로 스쳐 지나간 사람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감정 소모와 스트레스를 경험했는지 모른다."라고 했다.

 친구와 친구의 시절 빌런 얘기를 하며 브런치를 마무리했다.


 친구와 브런치를 즐기고 며칠 뒤, 최근 단골이 되신 손님이 오셨다. 40대 여성분이신데 겉으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게 사시는 분이라 오실 때마다 예쁘시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 손님이었다. 요즘 코로나가 끝나고 해외투자 사업을 하시느라 무척 바쁘신 손님이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해외를 오가는 일정 중에 예약을 잡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시며 시술 중에도 항상 업무전화를 받으시는 바쁘신 분이셨다.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와 바쁜 일정으로 힘들어하시는 눈치였다.

 "요즘 엄청 바쁘신가 봐요  오늘따라 굉장히 피곤해 보이세요" 하며 아는 채 했더니 진짜 요즘 너무 피곤하다면서 딱 하루만 푹 쉬고 아무 연락 없이 잠만 푹 자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에이,, 고객님은 쉬셔도 푹 못 쉬실 거 같은데요. 일도 바쁘시고 성격이 그게 안되실 거 같아요."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쉬어도 쉰 거 같지 않고 머리만 더 복잡해져요"


 "몸은 쉬는데 머리가 못 쉬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생각이 복잡하면 아무리 누워있어도 찌푸둥한 거처럼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어 보는 건 어떠세요? 제가 임신하고 너무 답답하고 심심해서 대학시절 친구를 며칠 전에 만났거든요.  그냥 그 친구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더라고요. 영양가 없이 그냥 웃고 떠드는 얘기도 좋고 일상 대화도 좋잖아요. "


 "친구는 지금 사업같이 하는 친구밖에 없어요. 다른 친구들은 만나면  시댁 얘기, 남편 얘기, 애들 얘기만 하는데 전 결혼도 안 해서 공통 관심사가 안 맞아요.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아요. 왜, 시절 인연이란 말 있잖아요. 20대 때 아무 생각 없이 놀 때 그때 친구들이거든요. 말 그대로 그때 그 시절 인연들이죠. 지금은 만나도 피곤하기만 해요. 서로 통하는 게 없어서 답답한 느낌만 들거든요."

 

"그럼 잠시라도 시간 되시면 부산 근교로 가서 혼자 예쁜 풍경 보면서 잠시 한두 시간 차 한잔하세요,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제가 좋은 장소 추천해 드릴게요!"


 이 말을 끝으로 고객님의 시술이 끝났고 오실 때와는 조금 나아진 피곤이 풀린 듯한 얼굴을 하시고선 가게를 나가셨다.


 요 근래 들어 시절 인연이란 단어를 반복적으로 들었더니 시절 인연이란 게 뭔지 생각하게 됐다.

 시절 인연이란 말 자체는 불교에서 나온 용어이며 [모든 현상은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라는 인과응보의 뜻을 가진 용어라고 한다.

 '시절 인연이라는 게 있나? 내 인생에서 일정한 한 부분에만 영향을 줬던 인연이란 게 있을 수가 있나? 어쨌든 나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준 거면 시절 인연이 아니지 않나? 결국 인생의 한순간에 영향을 준다는 건도미노 효과처럼 연쇄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연을 잘 끊지 못하고 웬만하면 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성격을 소유한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용어였다. 혹은 은연중에 과거의 부정적으로 스쳐 지나간 인물들을 떠올리고 그들에게 시절 인연이란 단어를 가져대면서 '그들도 어쨌든 인연이니까 나쁘게 생각하면 안 되지'라는 방어기제 속에 시절 인연이란 용어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치부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시절 인연이란 용어는 원래의 뜻대로 라면 대학친구의 시절빌런 언니는 대학친구가 새로운 인연이라고 반갑다며 신나게 사회생활을 하던 도중 아무나 한테 마음 주면 안 된다는 교훈과 함께 피와 살이 되는 실전 교육을 받은 셈 만나게 된 인연일 테고, 단골손님의 20대 친구들은 손님이 20대 때 그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게 재밌었기에 형성된 인연 아닐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걸 인연이라고 하고 한순간 인과응보적 성격을 띤 인연을 시절 인연이라고 한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 나랑 시기가 맞지 않은 인연을 치부하여 시절 인연이라는 말을 쓰는 것보단 조금 긍정적인 형태로 쓰이면 어떨까?  학창 시절 풋풋한 첫사랑을 경험한 기억 속 시절 인연, 대학시절 어려웠지만 잘 챙겨주셨던 교수님과의 시절 인연,  첫 사회생활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주던 첫 직장 상사와의 시절 인연, 자주 가던 식당 이모님과의 시절 인연같이 반짝거리고 몽글거리는 추억들 사이사이에 시절 인연이라는 말을 넣으면 시절 인연이란 단어가 조금은 예뻐지지 않을까?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날 인연은 만나게 되어있다는 시절 인연의 본 뜻처럼 나에게 온 인연 한 명 한 명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의미 없는 인연은 없다. 그 인연이 설사 나에게 악영향을 끼치더라도 다 나에게 경험이 되라는 큰 뜻이 숨어있지는 않을까? 피와 살이 되는 경험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연한 악연으로 애쓰고 있는 이들이거나,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해 아쉬운 이들이거나, 인연을 만나 행복한 이들. 그들 모두의 앞날에 아름다운 시절 인연이 찾아와 반짝거리는 마음을 경험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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