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가 아니라 내니하러 왔다..
바베이도스 수도이니 볼거리 가득할 것을 기대하며 갔지만, 우리가 제대로 못찾은건지 북적거리는 야외시장과 항구, 휑한 공원 말고는 볼 게 없었다.
그래도 야외 시장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는데,
동양인은 우리 외에는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눈에 띄었고 어리버리 관광객 포스를 풍기다보니 우리한테 호객 행위를 많이 하더라.
샵들을 좀 구경하다가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우리가 머무는 곳은 주로 리조트나 호텔들이 몰려있어 집들도 맨션에다 정돈되고 관광지 같은 분위기인데, 해안가의 집들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낡고 해진 컬러의 빈티지한 느낌이 물씬나는 집들이었다.
한 30분 정도 걸었나..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곳은 미국의 초대대통령 조지워싱턴이 바베이도스에서 머물던 별장(?)이었다.
당시 사탕수수로 유명하던 바베이도스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19세였던 조지워싱턴은 이복형제 로렌스 워싱턴의 결핵 치료를 위해 처음으로 미국을 떠나 바베이도스에 함께 와 머물렀다.
6주 정도 머무르면서 조지워싱턴은 미국 밖의 세상을 경험하며 견문을 넓히고 영국의 장교 및 고위급 관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후에 미국에 돌아가서 병역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캐리비안에서 성행하던 천연두에 걸리지만 회복하고 천연두 면역력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바베이도스에 오지 않았으면 그는 언젠가 천연두에 걸려 죽었을지도 모르며 군대나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미국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ㅎㅎ 유명인사의 6주간의 휴양차 방문에 미국의 역사를 논할 정도로 뭔가 크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뭐 그렇다 치고!! ㅎㅎ
두 청소년이 살기에 엄청 큰 맨션을 둘러보고 마지막 하이라이트, 당시 피난통로였다는 게리슨 터널을 걸어 나왔다.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 좁아 폐소공포증 있은 사람은 못걸을 듯 하다..
우리는 아주 부분적으로만 짧게 걸었지만, 이 통로는 다운타운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바베이도스..
나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남편 워크숍을 따라와 휴가를 즐기기 위해 왔지만, 기대했던 것 만큼 완벽한 휴가는 아니였다.
일단 스케줄을 보면 생각보다 널럴한 워크숍은 아니었다. 남편과 직장동료들은 아침 9-12시까지, 그리고 저녁 6-9시까지 매일 미팅에 참석해야 했다.
게다가 리조트에서 워크숍 장소까지는 걸어서 30분 (버스 10분) 거리였기 때문에 자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기보다 남편은 주로 걸어서 왔다갔다했다.
오전 미팅 끝나고 사람들과 네트워킹 좀 하다 리조트로 남편이 돌아오는 시간은 오후 1시가 넘어서였고 같이 점심 먹고 나면 오후에서야 몇시간 정도 가족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저녁 6시까지 다시 미팅(저녁식사 제공) 참석해야해서 남편은 5시넘어서 다시 준비해서 가야하고 나와 아이만 저녁식사를 알아서 해결하고 시간을 보내는 식이었다.
그래, 남편의 부재가 주였던 휴가지만, 그것만해도 내 유급휴가가 덜 아까웠을 듯 하다.
남편과 같은 워크숍에 참여한 직장 동료A도 딸S를 데려와서 우리와 같은 리조트에 머물게 되었다.
우리 아들보다 2-3살 정도 많은데, 일단 우리 아이는 또래 친구가 생겼다고 매우 좋아했다.
게다가 예쁘다고 더 좋아했다 ㅋㅋ 쪼고만게 누가 남자 아니랄까봐.. ㅋㅋ
다만 아이 S는 여자아이인데다 꽤 성숙해서, 천방지축 까불이 우리 아들이랑은 대화가 안통하니 함께 노는 걸 지루해했다.
S의 엄마이자 남편의 직장동료 A도 워크숍에 매일 아침 저녁으로 참석해야 해서 오전에는 딸을 혼자 리조트에 두고 미팅에 참석하고 저녁시간엔 딸을 워크숍에 같이 데려가 저녁을 먹이고 그 딸은 밤 9시까지 미팅이 끝날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S의 엄마 A는 혼자 두고 가는 딸이 걱정이 되니, 나에게 문자를 보내서 우리 아이가 자기 딸과 오전시간에 같이 놀아도 좋다고 (=같이 놀아달라) 했다.
여자아이에게 눈이 멀어 엄마 따위 보이지 않는 우리 아들은(..ㅜ_ㅜ) 매일 아침 눈뜨면 S가 머무는 숙소로 놀러갔고, 우리아이와 노는게 지루한 S는 나랑 대화하고 노는걸 좋아해서 결국 내가 머무는 숙소로 같이 찾아오고 결국 우리 아이는 혼자 게임기 붙잡고 놀고, 나는 S의 말상대를 해주며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오전에 아이와 둘이 나가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거나 침대에서 뒹굴며 게으름 부리고 싶었던 내 계획은, 남의 집 딸과 놀아주는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나도 처음 며칠 저녁은 남편 워크숍에 같이 참석해 저녁을 먹고, 일관련 미팅이 밤 9시까지 진행될 동안, 우리 아이와 A의 딸 S와 같이 기다리곤 했다.
그때도 주로 아들은 혼자 방방 밖을 뛰어다니며 놀고, 혼자 전자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나에게, 심심해진 S가 다가오면 결국 난 책을 내려놓고 S와 같이 얘기하며 놀아주는 식으로 흘러갔다.
이런 날들이 계속 되다보니 점점 어이가 없는거다.
엄마를 기다리는 S의 사정은 딱하지만, 나도 엄연히 직장에 내 귀한 유급휴가를 내서 릴렉스 하러 여기 왔는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오전시간, 저녁시간 남의 집 딸 내니를 하러 온 것 같은 기분인거다. 그리고 막상 내 아들은 혼자 게임하며 노는 식으로 흘러간다.
오후 4시간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점심식사 1시간 빼면, 3시간 안에 같이 어디를 가기가 애매해진다. 어디 관광지를 가도 잠깐 놀다 급하게 시간맞춰 리조트로 돌아와야 하는 식이었다.
나중엔 짜증이 날대로 나고 지쳐서 저녁시간에 나와 아들은 워크숍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혼자 엄마를 기다릴 S가 안됐지만, 그 집 엄마도 이럴거 다 알고 딸을 데리고 왔을 거고, 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날을 좀 편하게 보내고 싶었다. S와 놀겠다는 아이를 설득하느라 애먹었지만;; (아니, 막상 만나면 매번 팽 당하면서 왜 자꾸 S를 만나려하는지 우리집 아들래미도 진짜 이해가 안된다)
아무튼 이번 남편 워크숍에 따라온 이번 여행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남편의 제안으로 따라온거지만)
남편 학회, 워크숍에 내 귀한 휴가 내서 따라오지 않겠다고. 어차피 와도 가족이 같이 시간 보내기도 힘들고, 우린 마치 들러리로 온 기분이 종종 들기도 했다.
같이 워크숍에 참석한 동료들 중에는 워크숍 시작 전이나 후에 가족이나 연인이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만약에 우리도 남편을 따라 올거라면 그런식으로 일정이 다 끝나고 오는게 맞는 것 같다.
나는 본의 아니게 호구도 된 듯한 여행이었지만, 캐리비안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흥넘치는 그들의 문화, 해안가를 따라 2-3시간을 걸었던 트레일, 동굴탐험, 크루즈 타고 바다거북이 구경 등등 즐거운 경험도 나름 많았다. 특히, 아이는 아직도 바베이도스를 얘기하며 또 가고 싶어한다. S 얘기도 하며 자꾸 만나고 싶다고하는 아들(..)
아이에겐 그 바베이도스 여행이 재밌고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망한 휴가는 아닌 것 같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