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담이 됐다는 것은 가능했었기에 그랬겠죠? 하지만,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용은 돌연변이이지 않을까 싶어요. 돌연변이는 유전자에 새로운 형질이 나타나 생기는 것입니다. 돌연변이 용이 과연 일반적인 용(?)의 세상에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아니 조금이라도 그들과 어울려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아마도 그들(일반적인 용)은 낙인찍어 놓을 겁니다. ‘쟤는 개천에서 나온 용이야.’
뒤늦게 ‘설국열차’를 보았습니다. 폭력물, 영웅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잔인하긴 했지만 꼭 그런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생각거리를 던져준 영화더군요. 앞부분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만 후반부에서 주인공이 타도 대상(윌포드)과 마주 맞아 나누던 대화에서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진 듯했습니다.
“꼬리칸 사람들은 아무도 엔진까지 온 적이 없지.
난 꼬리 칸에 가본 적이 없고. 여기라고 마냥 좋기만 하겠나? 시끄러워. 외롭기도 하고. 커티스~ 누구나 미리 정해진 자리가 있고, 자네만 빼고는 모두 그 자리를 지켜.”
“그건 꼭대기에서 밑바닥을 보며 하는 소리지. 이 열차에 당신 자리를 마다할 사람은 없어.”
“자네라면 나랑 바꾸겠나? 이 망할 열차에 갇힌 건 모두가 마찬가지야. 이 쇳덩어리 안에서 우린 똑같은 죄수지. 그리고 이 열차는 폐쇄된 생태계야. 균형을 꾸준히 유지해야지. 공기, 물, 식량, 공급, 인구...
모두 균형을 지켜야 해. 최적화를 위해서.
다소 과격한 해결책이 사용된 때도 있지. 급격한 인구 감소가 필요한 때 말이야. 자연히 도태되는 걸 바랄 처지가 아니잖나. 열차는 미어터지고 기다리다 굶어 죽을 테니까. 차선책은 한 집단이 타 집단을 죽이는 거야. 가끔 한 번씩 소요를 부추길 필요가 있어.
(중략)
앞 칸과 꼬리 칸은 협력하는 관계야. 반란으로 안타깝게도 앞 칸이 예상 밖의 피해를 입었고, 생과 사의 운명이 얼마나 극적으로 갈리는지 몰라.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일은 숫자 계산이야. (꼬리칸으로 전화를 걸어) 18주년 기념으로 18명만 남겨.”
('설국열차'의 후반부 대화 중 일부)
누구나 미리 정해진 자리가 있고, 모두가 그 자리를 지키는 세상. 아니 지켜야만 평화로워지는 세상.
개천에서 용이 나면 그 평화를 깨는 건 아닐지.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싶어 검색하다가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를 접하게 됐습니다. 의도했던 것도 아니고, 내용을 알고 집어 든 것도 아닌데, 이 소설 역시 위의 내용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소설이었습니다. 주인공 부부는 예전에 배낭여행을 가서 만난 독일인 부부와 함께 캄보디아를 여행하는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톤레샵 호수의 수상가옥 마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을 여행 마지막 날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낙천적인 걸까? 불행 앞에서 결코 굴복하지 않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이곳 사람들의 천성이 경이로워”
“하지만 정말 이 사람들이 낙천적인 걸까요?”
“그럼 아까 수상가옥의 사람들을 봐. 가난하지만, 아이들 모두 얼마나 즐거워 보였어?”
“그것은 즐거워하는 게 아니에요. 그 아이들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갈 뿐인 거죠.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자기보다 돈이 훨씬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걸 즐길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그렇다면 자넨 우리가 그곳에 가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난 관광객들이 없으면 그 아이들이 상대적 빈곤을 느끼지는 않아도 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누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 달러를 벌기 위해 구걸하듯 돈을 달라고 해야 하는 삶에 익숙해지지는 않아도 될 거라고 말이죠.”
“그런데 자네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 그들의 얼굴을 보고도 그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 내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어. 그들에게는 보트를 젓고 바나나를 파는 것이 다 노동인 거야. 일 달러 팁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고, 그들에게는 수상가옥과 그들의 삶이 돈벌이 수단이야. 관광객들이 원숭이를 보듯 바라본다고? 하지만 관광객들이 없으면 어찌 되겠어? 그들은 지금처럼 먹고살 수조차 없어. 자네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돈 버는 일이나, 이곳 사람들이 바나나를 팔면서 돈 버는 일이 다른 행위라고 생각해? 나는 그런 생각이 오히려 그들의 노동을 폄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어. 거기에 만족하고 살면 그곳이 천국이야. 불만족하는 순간 증오가 생기고 폭력이 생기지. 증오와 폭력은 또 다른 증오와 폭력을 낳고 말이야. 그게 우리가 지난 반년을 보내고 얻은 교훈이야.”
“개소리. 만족이라고? 천국이라고? 캄보디아 사람들이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한 거야? 홍수가 났는데, 침수되는 집을 보면서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어? 이 나라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이 나라의 상황에 일말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낭만이니, 평화니, 그딴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야. 폭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건 폭력 이외의 수단을 갖지 못한 자 들뿐이라고.”
(여름의 빌라 / pp62-66 중)
요즘 들어 학벌, 학연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외국 대학의 학위를 가진 자들, 소위 말하는 국내의 명문대를 나온 자들의 학연과 그들의 카르텔. 자기들 외에는 모두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출신대학이 외국이고, 명문대 출신이면 뭔가 대단한 듯 언론에서 떠들어주는 세상.
지난 정권 들어 '카르텔'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는데, 최근 일어난 현상들도 그들만의 카르텔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개천에서 용이 나와도 그 용은 그냥 돌연변이 용 일뿐입니다. 그들의 세상에서는 용으로 받아주지 않으니깐요. 용의 세상에서는 아마 ‘용이 되어 용의 세상에 들어올 것이 아니라 개천에서 물놀이나 하면서, 거기에 만족하면서 살았어야 할 그냥 조금 특별한 물고기 한 마리’로 살았어야 했다고, ‘왜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었냐’고 나무라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용이 될 능력도 없거니와 용이 될 맘도 없기에 자격지심으로 비치지 않을까도 싶지만,
이렇게 살아야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요? 정말로 각자의 정해진 자리에서 그 역할대로만 만족하고 살면 그곳이 천국일까요? 용이 되면 안 되는 걸까요? 그들만의 세상에서 나의 자리에서 묵묵히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가리키는 대로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