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에게는 '긁히는 날'이 있습니다. 투수는 야구공에 있는 108개의 실밥을 이용해 직구(빠른 공)와 변화구를 던진다. 손가락으로 실밥을 어떻게 긁느냐(이용하느냐)에 따라 공은 다르게 날아가는데, 투수에게 '긁히는 날'은 변화구뿐 아니라 직구까지도 제대로 긁혀서 타자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날이죠. 이런 날은 투수가 바로 느낄 수가 있고, 타자를 아웃시키는 기쁨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오늘은 긁히는 날이구나'를 알게 되면서 타자를 맘껏 요리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더해지는 그 느낌을 알 수 있는 날입니다. 아마, 프로 투수들도 오랜 시간 야구를 하지만 이런 날은 잘 없을 거예요.
저는 야구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물론, 사회인 야구를 하긴 합니다), 나에게도 긁히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읽히는 날'과 '쓰이는 날'.
책을 자주,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지만, 가끔 '이 책 재밌네, 다음 장이 궁금해지는데...'라고 느껴지는 책이 있고, 그렇게 '읽히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이면 투수의 공이 제대로 긁히는 것처럼, 제대로 읽혀서 책을 손에서 놓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느껴지죠. 핸드폰보다 그 책을 먼저 손에 쥐는 날입니다. 아쉽게도 최근 1년 내에는 아직 그런 책을 만나지 못했네요. 그런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책 읽을 엄두를 못 냈기 때문입니다.
이놈의 핸드폰 때문에. 영상에, 쇼츠에, 뉴스에, SNS에.... 굳이 무거운 책을 들지 않아도 손안에 쏙 들어가는 핸드폰만 있으면 즐거움과 궁금증을 바로 해결할 수 있으니 책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되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생각'을 계속하지 않게 되네요. 그만 봐야지, 그만 봐야지 하지만 쉽게 놓지 못하고 또 한 번, 또 한 번 스크롤과 터치를 하며 점점 빠져들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요즘 들어 '읽히는 날'이 그리워집니다. 순간의 자극이 즐거움을 주지만, 이제는 '이러다 생각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는 건 아닌지 겁이 나기 시작해서입니다. 그래서, 다시 책을 읽으려 장편소설(철도원삼대/황석영) 하나와 고전 미니북(인간 실격/다자이 오사무) 하나, 그리고 교양집(더쑈/탁현민) 하나를 번갈아 읽고 있다. 두 개는 집에서, 하나는 전철에서... 제대로 읽히지는 앉지만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렇게나마 애쓰고 있습니다.
'읽히는 날'을 만들 수 있는 책을 빨리 다시 만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주 생각 나는 책이 생각의 기쁨, 평소의 발견, 없던 오늘을 쓴 유병욱의 책입니다. 기다리는 책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빨리 새로운 책이 나와서 나에게 '읽히는 날'을 선물해 주면 좋겠네요.
나에게 또 다른 '긁히는 날'은 '쓰이는 날'입니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물론, 가끔 이렇게 블로그와 SNS에 글을 쓰지만) 아니지만, 그 긁히는 날의 느낌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날.
쓸 글들이 머릿속에 충만하고, 빨리 글로 쓰고 싶다고 느껴지는 날,
그 생각들이 바로바로 글자로 화면에 쓰이고, 한 문장의 마침표를 찍음과 동시에 그다음 문장도 자연스레 쓰이는 날.
나의 생각을 끄적끄적하는 정도로 글을 쓰는 저에게도 이런 날이 있을 정도인데,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분들에게 이런 날은 어떤 기분일까가 문득 궁금해지네요. 아마도 투수가 느끼는 '긁히는 날'의 그런 기분이겠지요? 제가 가끔 느끼는 '쓰이는 날'은 몇 날 며칠을 쓸 거리를 생각하고, 메모해 두고, 기억해 두고서는 드디어 날을 잡고 한 번에 쓰는 날입니다. 제가 느끼는 이런 기분이 참 좋습니다. 때론 '나도 글을 좀 쓰는구나'라고 착각하고 자만해지기도 하지만.
또 하루를 더 들자면, '먹히는 날'입니다.
아침을 커피 한잔으로 채우는 저는 때로 빵과 과자가 먹고 싶을 때가 있고, 하나를 먹고는 또 하나를 먹고 '맛있다'라고 느껴지는 날입니다. 이런 날은 점심도 저녁도,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날이고,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이고, 배부르게 먹었는데도 또 먹고 싶은 그런 날이죠. 정말이지 이런 날은 거의 없지만, 가끔 이런 날을 만나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긁히는 날'
'읽히는 날'
'먹히는 날'
'쓰이는 날'
자주 만날 수 없는 귀한 날들.
우리의 인생에서 '긁히는 날', '읽히는 날', '쓰이는 날', '먹히는 날'이 꼭 한 번은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