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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rard Mar 03. 2020

03.02.2020

 스물여덟이었던 것 같다. 하고자 하는 일은 어그러지고, 취업은 안되고, 기분은 끝도 없는 칠흑의 구덩이 속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던 시기가. 한 가지 좋았던 점이 있었다면 차고 넘칠 정도로 시간이 많았다는 것 정도였다. (이건 지금 생각해 보니 좋은 점이지, 당시는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삶 자체가 말라비틀어져 바스러지기 직전의 풀잎 같았다. 풀잎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여행이었지만, 버스 탈 돈이 없어서 한두 시간 걷는 건 일상이었던 시기였기에 여행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날은 주머니 속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백 원짜리 동전 두 개정도가 있었나 보다. 눈이 내리던 겨울 어느 날, 종점 여행이라도 해볼 심산으로 집 앞 정류장에서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무슨 생각들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단지 나는 기분이 우울했고, 노래 한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창밖으로 눈발 흩날렸고, 어딜 가는지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은 내 눈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한 시간 반쯤 걸렸었나? 이름도 정직한 '동부종점'에 도착했다. 이십 대 초반에 종점 근처 웨딩홀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몇 번 한 적이 있어서 생경하지만, 또 어느 정도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날 기분이 그랬나 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 종점으로 가자니 겁이나, 낯설지만 또 낯설지만은 않은 그런 장소를 찾아갔나 보다. 생각해보니 그날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나 보다. 낯설지만 또 낯설지만은 않은 사람을 만나, 내가 힘들다는 이야길 하면 적당히 위로해주고, 뒤돌아 버리면 금세 잊어버려 줄 수 있는 사람. 결국 그날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왔던 길을 복기하며 왔을 때보단 조금 많이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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