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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Nov 12. 2019

막내작가 탈출 사건

비상구가 어디죠?


새로운 막내작가가 들어왔다. 1년 동안 막내작가가 세 번째 바뀌었다. 서브작가 여덟 명에 막내작가 두 명. 막내작가 한 명이 서브작가 넷을 서포트한다. 막내작가 중 한 명이 예능작가를 하고 싶다고 3개월 만에 떠난 것이다. 반면, 1년 넘게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혜연이는 조용히 일 잘하는 막내였다. 공석이 생기자 그녀가 지인을 소개했다. 그녀가 추천하는 친구라면 믿을 만하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제 신방과 동기인데, 성격도 엄청 활발하고 동아리 활동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때 학생회장도 했었고요.”     


혜연이의 설명과는 달리, 그 친구의 첫인상은 쑥맥같이 보였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인사를 하고 빈자리에 앉았다. 처음이라 어색해서일 것이다. 비장한 표정으로 첫 출근을 한 그 친구는 가방을 정성스럽게 푼 후 경직된 자세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로 온 친구의 서포트를 받아야 할 네 명의 서브작가는 취재 전화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료조사나 소소한 섭외는 주로 막내작가가 하는데, 새로 온 친구에게 해야 할 일을 일일이 설명해줄 시간이 없는 듯했다. 서브작가들은 새로 온 친구에게 일을 시키는 대신 익숙한 혜연이를 계속해서 불렀다.     


“혜연아, 여기 전문가 리스트 좀 줘볼래?”

“혜연아, 아까 연락해본 데는 뭐래?”

“혜연아, 거기 협회에 공문 좀 보내줄래?”

“혜연아, 이거 프리뷰 좀 맡겨주라”     


“네 언니”     


혜연이는 항상 고요했다. 마치 잔잔한 호수 위를 유영하는 백조 같았다. 그녀의 두 발은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반면, 새로 온 친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살폈다. 혜연에게 물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녀는 너무 바빠 보였다. 그렇다면, 선배 작가에게 “저는 어떤 일을 하면 될까요?”하고 물어보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생각보다 더 숫기가 없는 친구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끔 다이어리에 무엇을 메모하는 듯했다.      


점심시간, 우리는 혜연과 새로 온 친구를 챙겨 밥을 먹으러 갔다. 식사 자리에서도 새로 온 친구는 말이 없었다. 묵묵히 밥을 넘기며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도 멍을 때리고 있는 친구.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새로 온 친구에게 전문가 전화번호를 주며 섭외를 부탁했다. 그 친구는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다.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번호를 눌렀다가, 무엇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황급히 끊고 다시 다이어리에 뭔가를 끄적였다.     


막내작가 일을 막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모두가 제 자리에서 바쁘게 일하는 동안, 나는 무얼 할지 몰라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한 마디로 뻘쭘했다. 섭외 전화를 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선배 작가들이 모두 내 통화를 주시하는 거 같아 부담스러웠다. 새로 온 친구 역시 비슷한 심정이겠지.      


나는 그녀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려고 마음을 먹었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내 일하기도 바빴지만 사실 귀찮았다. 3개월 전, 입사한 막내작가에게 ‘해야 할 일’ 리스트를 요일별로 뽑아서 꼼꼼하게 가르쳐줬지만 보란 듯이 ‘예능작가’를 하고 싶다며 떠나버렸다. 교양작가들은 실컷 일을 가르쳐 놓으면 막내작가들이 ‘예능을 한다며’ 떠나버리는 현상에 지쳐있었다. 교양 프로그램은 보는 사람에게도, 만드는 사람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결국 내가 부탁했던 섭외 전화는 혜연이가 했다.     


새로 온 친구는 다음날 출근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빠른 수순이었다. 소개를 해준 혜연이는 굉장히 민망해하면서 상황에 맞지 않게 본인이 사과를 했다.     


“걔가 절대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 책임감도 강한데, 저도 이번에 좀 놀랐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지! 근데 이유가 뭐래? 방송작가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     


“엄청 하고 싶어 했죠! 그래서 소개해준 건데... 이유가 좀 황당한 게 언니들이 무섭대요. 언니들 다 좋은데.”     


혜연의 말대로 황당했다. 그 누구도 그 친구에게 혼을 내거나 눈치를 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투명인간처럼 홀로 버틴 열시간 남짓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지 짐작이 간다. ‘무섭다’는 의미는 꼭 누가 호통을 쳐서가 아니다. 어쩌면 지독한 무관심과 모든 걸 홀로 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였을 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제 갓 대학 졸업을 한 사회초년생 아닌가.     


나는 자책감을 느꼈다.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막내작가는 금방 떠나버린다는 편견으로 우리가 해야 할 최소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 건 아닐까. 사실 나 역시 막내작가 때 정말 막막했었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누구 하나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말 그대로 눈치껏 일을 배워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 눈치싸움에서 최소 3개월 정도 버티면 ‘일’ 답게 일을 할 수 있다. 버틸 수 있으면 버텨보란 꼴이다. 하지만 우린 감정을 지닌 인간이다. 아무리 근무환경이 열악한 것을 알고 들어왔다고 해도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아무렇지 않을 사람은 없다.     


“걔는 어차피 그만둘 애였어,
하루빨리 그만둔 게 다행이지 뭐.”     


서브작가들은 자책감을 덜기 위해 한 목소리로 그녀를 탓했다. 나 역시 동조하며 ‘요즘 애들의 나약함’을 논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못난 선배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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