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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강대교가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템을 못 잡은 방송작가의 저주


막내작가가 제작사를 고를 때의 한 가지 팁이라면 그 제작사가 어떤 프로그램들을 하고 있는지 미리 확인해보는 게 좋다. 경력이 없는 막내작가의 경우, 받아준다고 하면 어디든 가고 싶겠지만 그곳에서 1년을 넘게 일하고 입봉까지 노린다면 신중해야 한다. ‘아침방송’이라 불리는, 짧은 코너 VCR과 스튜디오로 구성된 매거진 프로그램이 있는 제작사에 들어가는 게 유리하다. 아무래도 아예 모르는 사람을 새 식구로 들이기보다는 옆 팀에서 얼굴을 보았던 막내작가를 입봉 작가로 앉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나는 다큐멘터리만 제작하는 제작사에서 막내작가 생활을 시작하는 바람에 입봉 기회가 쉬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먼저 입봉을 한 나의 작가 친구가 자신이 일하는 아침방송에 서브 자리가 났다며 날 불렀다. 기회였다. 1년 동안 내가 해왔던 일을 자기소개서에 상세히 풀었고, 형식적인 면접 끝에 합격했다. 방송계에서의 이직은 이처럼 보통 인맥으로 이뤄지는 편이다. 그만큼 방송계는 작고 소문이 무성한 곳이다. 일을 잘 못한다거나, 선배에게 밉보였다가는 안 좋은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 부당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어쨌든 드디어 그렇게 그리던 ‘서브작가’ 이름표를 달았다. 막내에서 서브가 되는 것은 작가로서 큰 의미가 있다. 서포터였던 신분이 '상승'하여 드디어 진정한 '작가'가 된 느낌이랄까. 물론 메인작가의 터치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내가 책임져야 할 ‘코너’가 배당된다.

     

나는 데일리 아침방송의 한 코너를 맡았는데 코너의 성격은 랜덤이었다. 주로 아침에 아이들 학교 갈 채비를 하며 TV를 시청하는 주부들을 위한 아이템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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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시즌 아이템'은 계속해서 바뀐다. 이슈가 생기면 '기획 아이템'을 코너로 넣는다. '사건사고'나 '부부솔루션' 같은 아이템은 고정으로 간다. 골치 아픈 건 사건사고 아이템을 맡을 때다. 사건사고는 보통 프로그램 앞부분에 배치되는데 자극적인 소재가 많아 시청률을 견인하는 역할을 한다.  시의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최대한 아이템을 늦게 확정한다. 아이템을 늦게 잡는다는 의미는 섭외, 구성안 작성, 촬영, 프리뷰, 편집구성안 작성, 자막, 대본까지 모든 일을 최대한 방송 시일에 가까워서야 처리할 수 있다는 거다. 아침 방송의 경우 위의 과정을 24시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모두 해결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3월 5일 방송이면 3월 4일까지 국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뉴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하다가

가장 최후에, 큰 건의 사건사고를 아이템으로 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더 좋은 아이템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끝까지 아이템을 잡지 못하면 큰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 아이템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타이밍을 잡는 것도 참 어렵다.


당시엔 스마트폰이 없었다. (세상에!) 이불속에서도 실시간 뉴스를 확인할 수 있는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퇴근 후 서브작가 6명이 보초 당번을 정했다. A는 밤 10시~12시, B는 새벽 12시~2시, C는 새벽 2시~4시, D는 새벽 4시~6시 이런 식으로 각자 보초를 서는 시간을 정했다. 자다가도 자신이 맡은 시간이 되면 잠을 깨우고 일어나, 의자에 앉아서, 컴퓨터를 켜서, 연합뉴스 사이트를 1분에 한 번씩 새로고침 한다. 새로운 사건이 터져 내 아이템이 생기길 바라며.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는 아이템을 잡는 게 경쟁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데일리 프로그램의 경우 요일별 5개의 제작사가 함께 일하기 때문에, 먼저 좋은 아이템을 발견하고 '찜'하는 일이 시청률 싸움에서 승자가 되기 쉽다.

     

나와 동갑이었던 서브작가 현미는 방송날이 다가오도록 아이템을 못 잡아 매우 예민한 상태였다. 대표님이 사무실 벽에 걸린 TV를 켰다. 방송 아이템 거리가 없는지 다들 고개를 들어 올려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를 잠시 후 하늘로 쏘아 올린다는 역사적인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미는 TV를 올려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크게 내뱉었다.

     

터져라... 터져라... 터져라!  


그녀를 비웃듯 나로호는 무사히 하늘 위로 솟구쳤고 제작진의 웃음만 터졌다.

     

서브작가는 아이템을 잡는 일만큼 출연자 섭외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막내작가와 달리 본인의 코너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상사태에는 전 작가들이 나서서 도와주고, 총책임은 메인작가라지만 나의 코너가 있다는 점은 정말 무겁다.


나는 여의도로 출근하기 위해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서강대교를 건넜다. 방송이 코앞인데 아이템을 잡지 못하거나 출연자 섭외를 못했을 땐, 다리가 무너져 내가 탄 버스가 추락했으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을 하곤 했다. 사고가 나서 다리나 팔 한 군데가 부러져 출근을 안 했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아이템을 잡지 못해 내 코너만 불방이 되면 어쩌지?'

'그것 때문에 우리 제작사가 피해를 보면 어쩌지?'


망상은 눈덩이처럼 제 몸을 불렸다. 하지만 방송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어떻게든 방송은 나간다’     



10년을 넘게 일하면서 아이템을 잡지 못해 불방이 되거나 사고가 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그 말을 진리로 지키기 위해 오늘도 서브작가는 눈이 아프게 세상을 들여다보고 전화를 돌리고 한숨을 쉰다. 그리고 일주일 새 1년은 늙어버린 몸으로 침대 위에 쓰러진다. 하루를 온전히 잠으로 보내고 '내 쉬는 날은 도대체 누가 훔쳐갔냐'며 원망할 새도 없이 다시 여의도 행 버스에 오른다. 서강대교를 건너며 차창 밖을 바라본다. 따스한 햇살이 그녀를 위로한다. 스물다섯의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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