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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나는 서강대교가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템을 못 잡은 방송작가의 저주

막내작가 일을 1년 넘게 했지만

입봉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내가 있는 제작사는 다큐멘터리만 만드는 회사였고,

그러다 보니 5분 내외의 짧은 꼭지를 써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천사 메인작가 언니도 인맥을 총동원해보았지만,

그녀의 주변 역시 1시간짜리 긴 호흡의 다큐멘터리를 하는

동료들이 대부분이라 소개도 쉽지 않았다.

     

막내작가가 제작사를 고를 때의 한 가지 팁이라면

그 제작사가 어떤 프로그램들을 하고 있는지

미리 확인해보는 게 좋다.

경력이 없는 막내작가의 경우,

당장 받아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겠지만

그곳에서 1년을 넘게 일하고 입봉까지 노린다면

‘아침방송’이라 불리는 짧은 코너 VCR과 스튜디오로 구성된

매거진 프로그램이 있는 제작사에 들어가는 게 유리하다.

아무래도 아예 모르는 사람을 새 식구로 들이는 것보다는

옆 팀에서 얼굴을 보았던 막내작가를

입봉 작가로 앉히는 것이 ‘안전’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먼저 입봉을 한 막내작가가

아침방송에 서브 자리가 하나 더 났다며 날 불렀다.

1년 동안 내가 해왔던 일을 자기소개서에 상세히 풀었고,

간단한 면접 끝에 합격!     


드디어 ‘서브작가’가 됐다.

막내에서 서브가 되는 것은 작가로서 큰 의미가 있다.

서포터에 그쳤던 신분이 '상승'하여

드디어 진정한 '작가'가 된 기분이랄까.

물론 메인작가의 터치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내가 책임져야 할 하나의 ‘코너’가 배당된다.

     

나는 데일리 아침방송의 한 코너를 맡았는데

코너의 성격은 랜덤이었다.

주로 아침에 아이들 학교 갈 채비를 하며

TV를 시청하는 주부들을 위한 아이템이 많았다.     


봄맞이 대청소법
미세먼지 잡는 공기정화식물 키우기
입학식 패셔니스타 엄마 되는 방법!

과 같은 시즌 아이템은 계속해서 바뀐다.     


사건사고나 부부솔루션 같은 아이템은

고정으로 간다.     


골치 아픈 건 사건사고 아이템을 맡을 때다.

사건사고는 보통 프로그램 앞부분에 배치되고

시청률을 견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시의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최대한 아이템을 늦게 확정한다.     

아이템을 늦게 잡는다는 의미는

섭외, 구성안 작성, 촬영, 프리뷰, 편집구성안 작성, 자막, 대본까지

모든 일을 최대한 방송 시일에 가까워서야

처리할 수 있다는 거다.

아침 방송의 경우 위의 과정을 24시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모두 해결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3월 5일 방송이면

3월 4일까지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뉴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하다가

가장 최후에, 큰 건의 사건사고를 아이템으로 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더 좋은 아이템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끝까지 아이템을 잡지 못하면 큰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 아이템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타이밍을 잡는 것도 참 어렵다.


당시엔 스마트폰이 없었다. (세상에!)

이불속에서도 실시간 뉴스를 확인할 수 있는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퇴근 후 서브작가 6명이 보초 당번을 정했다.

너는 밤 10시~12시,

너는 새벽 12시~2시,

언니는 새벽 2시~4시,

언니는 새벽 4시~6시 이런 식으로  

각자의 보초 시간을 정하고

자다가도 잠을 깨서,

의자에 앉아서,

컴퓨터를 켜서,

연합뉴스 사이트를 1분에 한 번씩 새로고침 한다.

새로운 사건이 터지길 바라며...

내가 대본을 쓸 수 있는 아이템이 생기길 바라며.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는

아이템을 잡는 게 경쟁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데일리 프로그램의 경우 요일별 5개의 제작사가

함께 일하기 때문에,

먼저 좋은 아이템을 발견하고 '찜'하는 일이

시청률 싸움에서 승자가 되기 쉽다.

     

나와 동갑이었던 서브작가 현미는

방송날이 다가오도록 아이템을 못 잡아

매우 예민한 상태였다.     

대표님이 사무실 벽에 걸린 TV를 켰다.

방송 아이템 거리가 없는지

다들 고개를 들올려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를

잠시 후 하늘로 쏘아 올린다는

역사적인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미는 TV를 올려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크게 내뱉었다.

     

터져라... 터져라... 터져라!!!!     


하지만 그녀를 비웃듯

나로호는 무사히 하늘 위로 날아가버렸

대신 제작의 웃음만 터졌다.

     

서브작가의 아이템과 출연자 섭외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막내작가와 달리 본인의 코너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상사태에는 전 작가들이 나서서 도와주고,

총책임은 메인작가라지만

나의 코너가 있다는 점의 무게는 이처럼 상당하다.  


나는 여의도로 출근하기 위해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서강대교를 건넜다.     

방송이 코앞인데 아이템을 잡지 못했을 때

다리가 무너져 내가 탄 버스가

추락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아니면 사고가 나서 다리나 팔 한 군데가 부러져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됐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아이템을 잡지 못해 내 코너만 불방이 되면 어쩌지?

그것 때문에 우리 제작사가 피해를 보면 어쩌지?


망상은 눈덩이처럼 제 몸을 불려 간다.     

하지만 방송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방송은 나간다’     


10년을 넘게 일하면서 아이템을 잡지 못해

불방이 되거나 사고가 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그말을 진리로 지키기 위해 오늘도 서브작가는

눈이 아프게 세상을 들여다보고

전화를 돌리고 한숨을 쉰다.

그리고 일주일 새 1년은 늙어버린 몸으로 

침대 위에 쓰러진다.


하루를 온전히 잠으로 흘려버리고

'내 쉬는 날은 도대체 누가 훔쳐갔냐'며 원망할 새도 없이

다시 버스에 오른다.

사무실로 향하는 서강대교를 건너며 차창 밖을 바라본다.

따스한 햇살이 그녀를 위로한다.

스물다섯의 나를 응원한다.


기운 내. 오늘 하루도 잘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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