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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도 템빨!

계절은 하지를 지나 소서로

by 글방구리

주말농장에서 검정 비닐을 치지 않은 밭은 우리 밭뿐이야. 농장주인 옆집 결이 엄마는 지난봄, 고랑을 만들어 주면서 비닐을 치라고 권했지만 건성으로 대답하고 넘겼어. 대단한 환경주의자는 못 돼도 해마다 산더미처럼 쌓이는 농업 폐기물에 나까지 보태고 싶진 않아서. 달랑 두 고랑 지으면서 그 풀도 감당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지.


땀 뺄 각오는 했어, 얻고 싶은 작물의 성장 속도와 뽑아 버려야 하는 잡초의 성장 속도는 서로 맞바꾸면 좋을 만큼 반비례한다는 걸 아니까 말이지. 처음엔 만만해 보여도 해가 길어지고, 수은주가 올라가고, 때맞춰 비가 내리고, 사람의 피를 그리워하는 모기들이 창궐하는 때가 되면, 텃밭은 힐링하러 가는 놀이터라기보다 미루고 미루다 마침내 붙들려 가는 군대처럼 부담스러워지는 곳이 된다는 것도. 하지만 어쩌겠어, 씨앗은 뿌려졌고 주사위는 던졌는걸. 가야지, 풀 뽑으러.


동이 트기 전에 눈곱도 떼지 않고, 긴 팔 긴 바지로 갈아입어. 전투화 끈 묶는 심정으로 장화를 신고, 적군의 공격을 대비해 챙모자의 끈을 턱 밑으로 단단히 묶어 주지. 땀을 닦아 줄 수건 하나 목에 두르고 출격. 그런데도 모기가 얼굴을 몇 방 물고 갔네. 농사도 '템빨'이 받쳐 줘야 고생을 덜 하는데. 내년엔 얼굴까지 덮어 주는 모기장 달린 모자를 꼭 사고 말겠어.


농부야말로 피아 구분이 확실한 사람이야.

"어머, 요 앙증맞은 돌나물 꽃 좀 봐. 너무 예쁘지?"

봄바람 따라 살랑살랑 산책하던 길에서 눈맞추며 인사했던 야생화들을 농부가 되어서는 그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아. 그들은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이름 없는 한 무리의 '잡초'일 뿐이지, 뿌리까지 뽑아내서 삼족을 멸해야 하는! 그뿐인가? 농사를 짓지 않을 때는 고이 모셔다가 싱싱한 상추 공급하며 키우던 달팽이도, 아이들이 잡아도 다리가 부러질세라 조심조심 놓아 보내주던 메뚜기도, 고전 무용수처럼 단아한 춤사위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나비도 가차 없이 쫓아버리고 처단해야 할 적군일 뿐이야. 그들과 함께 보낸 다정한 날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텃밭은 풀밭이 되고 말지. 나는 구멍이 숭숭 난 깻잎을 먹어야 하고, 씻으며 슬어 놓은 알들을 미처 보지 못하면 쌈을 싸 먹으려다 경악하게 돼.

그런 소소한 피해가 나한테서 끝나면 괜찮은데, 내 밭을 뒤덮은 풀들은 점점 더 기세 좋게 뻗어가 결국 남의 밭까지 침투할 테지. 그러면 옆 밭 농부님의 눈총과 제초제 세례를 피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는 가장 절망적인 절기이기도 해. 앞으로 남은 날들은 점점 더 더워질 거니까. 지금은 캄캄해도 빛이 올 거라는 희망을 하얀 새알심으로 빚어 냠냠 먹는 동지와는 결이 다르지. 동지가 오물 냄새 풍기는 구유에 누웠을지언정 생명 가득한 아기 예수의 시간이라면, 하지는 감옥에서 박해를 받다가 목이 잘리고, 그 목이 권력가들의 잔칫상에 제물로 올라가는 세례자 요한의 시간이지. 다가올 시간에는 아무런 위로가 없이 햇볕이 쨍쨍 내려쬘 거야, 마치 다 말라 죽이려는 듯 비장하게.


하지를 지나 소서 절기에 들어서는 동안, 일본은 대지진과 쓰나미가 온다는 예언으로 뒤숭숭했어. 자연재해를 당하며 사는 민족은 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 휴대폰이 상용화되기 전에 동네마다 있던 공중전화 부스처럼 골목마다 온갖 잡신을 모실 수밖에 없는 일본 사람들이 처음으로 안쓰럽게 느껴지더라. 사계절 24절기의 완만한 변화가 아닌, 늘 하지 절기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를 향해 "전쟁이나 나서 다 죽어버려라"라고 저주하는 일본인이 있다면 눈살이 찌푸려질 것처럼, 관련 기사에 "섬나라 쪽발이들, 쓰나미로 다 쓸려 가라"라고 써 놓은 댓글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 토착왜구라는 오해를 받는다 해도, 옆 나라 일본에 대지진은 부디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어. 족집게라던 만화가의 '영빨'도 이 더위와 함께 슬그머니 사그라져 가기를 바라.


예상치 못한 책 선물을 받았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날짜에 '하지'라고 적었다. 24절기를 의식하며 사는 요즘 초등생, 천연기념물처럼 귀한 존재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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