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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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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Mar 18. 2023

부부가 함께 잘 쉰다는 것

여행의 이유

아내는 날씨 운이 좋은 편이다. 여행 일정을 잡고 일기예보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어도 자신만만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러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어도 여행 당일에는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니까. 날씨 운이 없는 친구와 여행을 다녀도 하늘은 쾌청했다. 날씨 요정. 아내가 좋아하는 별명이다. 자신에게 운이 따른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인 듯했다.


그런 아내의 날씨 자부심에 균열을 일으킨 건, 신혼여행이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국에 결혼한 탓에 해외는 포기하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안타깝게도 돌아가야 할 때가 되어서야 하늘이 맑아졌다. 여행 내내 회색빛 하늘을 마주한 아내는 현실을 부정했다. 날씨 요정인 자신의 여행이 이럴 수 없다고. 이건 다 오빠 때문이라고. 부정 탔어. 이 날씨 요괴야.


괴라니. 말이 좀 심한 거 아니냐며 정말 요괴의 힘을 보여주겠다고 장난을 쳤지만, 정말 그 이후 우리 부부의 여행은 모두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떠나야 했다. 몇 년만에 갔던 부산 여행은 우산과 함께 하느라, 바다는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얼마 전 부안을 다녀왔을 때는 안개 같은 미세먼지로 풍경을 볼 수가 없었다. 정말 나의 날씨 운이 좋지 않기 때문인가. 날씨 요정과 날씨 요괴가 붙었을 때, 요괴의 기운이 더 쎈 것인가.



비 오던 날 도착한 부산 카페


 달 전 아내는 무작정 우리 두 사람의 비행기 티켓팅을 했다. 새해에는 여행 다니자. 여행? 좋지. 일전에 살짝 언질을 주었을 때, 흘려들으며 '좋지 뭐' 쯤으로 대답한 게 티켓팅으로 현실이 된 것이다. 아내는 일단 예약을 해놓아야 떠날 수 있지, 시간이 될 때 가겠다고 하면 못 떠난다는 철학으로 4박 5일의 일본 여행을 확정했다. 오랜 팬데믹 기간동안 우리 부부의 일상에서 쉼이 사라졌기 때문에, 여행이 꼭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여행 티켓팅부터 계획까지 앞장서서 해주는 배우자가 있는데 싫어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나는 마음 속 어딘가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돌아보면 여행을 비롯한 휴가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자영업을 하면서부터였다. 자영업자가 무슨 워라밸이냐. 젊었을 때 워워워 해야, 나이 들어서 라라라 하고 사는 거야. 젊었을 때 워라밸 꼬박 꼬박 챙기면 나이 들어서 워워워 한다니까. 일을 시작하면서 어느 선배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직접 일을 하면서 느낀 건, 자기 일을 하는 이상 애초에 일과 삶을 구분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머릿속엔 일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특별히 급한 일이 없도, 불확실한 미래는 걱정과 대비책을 끊임없이 고민하게끔 만든다. 자연스레 쉬어가는 시간을 멀리하게 되고, 심지어 쉼에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라이프 안에 워크가 있는 거지, 워라밸이 다 무어냐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해지자면 스스로 일 하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을 구분하기 어려우니, 일과 삶의 균형이란 말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일에 매몰되는 동안 나 자신과 주위를 돌볼 여유 마저 잃게 된다는 데 있다.






나와 달 아내에게 여행은 오래 전부터 쉼이었다. 휴식의 공간은 일상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다. 여건이 된다면 해외가 좋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모든 일로부터 물리적으로 분리되어야 온전히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이란 얽매이던 무언가로부터 스스로 분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명상으로 생각을 비워내는 것, 운동으로 잡념을 날려버리는 것, 좋아하는 영화와 책에 몰입하며 잠시 다른 일을 잊는 것, 낯선 곳을 여행하며 일상에서 떨어져 보는 것. 우리가 쉬는 동안 하는 모든 것이 분리 아닌가. 잘 쉬는 법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쉼과 환기의 순간을 함께 보내면 서로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에 날씨는 중요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잠시 멈추겠다는 의지, 일상에서 분리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날씨는 쉼의 가치를 잘 아는 이를 요정으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맑은 하늘을 기대하며 스스로 떠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일상도 파란 하늘처럼 만들 수 있을테니까. 그렇다면 나도 언젠가 날씨 요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보다 이번 여행 날씨는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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