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새로운 은유를 찾아서
동생이 데려 온 고양이는 귀엽지 않았다. 귀엽기보단 늠름했다. 처음부터 고양이를 집에 들이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나는 귀엽지도 않은 주제에 까칠한 녀석을 볼 때마다 심난했다. 내 앞가림도 못하던 시절이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집에 들인 이상 책임은 져야 하고, 불투명한 내 미래에 신경 쓸 일은 많고, 이를 어찌하나 걱정만 쌓여갔다. 그런 내가 누구보다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였다.
나에게 고양이는 거리의 풍경이었다. 자동차 밑에, 쓰레기봉투 옆에, 늘 그 쯤 어딘가에 있었지만 배경일뿐이라 의식하지 못했던 거리의 풍경. 그러던 어느 날, 집 앞 골목길에 사람들이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집에 있는 고양이 때문에, 거리의 고양이가 눈에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고양이란 동물을 누구보다 사랑하게 되었다. 날 선 경계심을 가졌지만, 도움을 갈구하고, 독립적인 체하지만, 의지할 인간을 찾는 모순된 모습이 주는 처연함이 당시의 나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의 사랑은 은유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결코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않겠다는 철학을 가진 바람둥이 토마시가 등장한다. 그러나 견고한 가치관은 깨뜨리라고 있는 법. 토마시는 독감에 걸려 자신의 집에 머물게 된 테레자라는 여자에게 빠지고 만다. 그때 그는 테레자를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빠진 아기처럼 느끼는데, 이것은 오래된 은유다. 모세. 구원자. 그리고 작가는 주인공의 감정에 설명을 덧붙인다.
사랑은 단 한 번의 은유로 시작된다고.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같은 과 선후배로 조금 친해졌을 뿐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아내와 나누는 대화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는 나의 이야기를 아내처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두서없이 말하는 이야기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길을 잃은 이야기 속에서 알맹이를 찾아 정리된 말로 나에게 돌려주는 것 아닌가. 이만하면 내가 찾아야 할 나의 반쪽이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잃어버린 나의 반쪽이라는 은유. 인간은 본래 둘이 하나였으나, 제우스가 반으로 갈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잘려 나간 자신의 반쪽을 찾고 싶은 욕망을 가지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플라톤은 <향연>에서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어 말했다. 그 시절의 나는 사랑을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사랑은 그리 단단하지 않고, 뜨거웠던 감정은 차갑게 식고, 나의 반쪽이라 생각했던 사람과 나는 생각보다 조각의 이음새가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실은 잃어버린 반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각이 긴 시간 얽히고설켜 갈라놓기 어려워졌다는 것에 가깝다. 더 이상 상대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상대와 함께 할 때, 우리는 그제야 사랑에 빠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은 언제든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만, 더 이상 어느 시점 이전으로는 돌아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11년 연애에 3년의 결혼 생활. 이쯤에서 아내와 나의 관계에 새로운 은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시간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14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은유. 그 마음이 우리의 사랑에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해 주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