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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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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Dec 10. 2023

남자는 왜 결혼을 하면 초딩이 되는가.

결혼은 연애와 차원이 다른 결합

심심하다. 방에서 거실을 빼꼼히 내다보니 아내가 노트북 작업을 하고 있다. 괜히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든 나는 우선 아내 앞에 섰다. 우에에에엑, 하고 괴성을 지르며 공룡인지 도마뱀인지 모를 자세로 아내에게 뛰어들듯 안긴다. 아니. 저기요. 밖에서는 세상 점잖은 양반이 집에서만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오빠가 오빠여서 좋았는데, 왜 갈수록 초딩이 되는 거야. 아내는 속았다며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한숨을 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질색하는 아내의 표정이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소파에 뒹군다.


아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일으켜 앉히고는 똑바로 대답하라는 눈빛으로 물었다. 연애까지 십삼 년을 함께 보냈는데, 이 모습을 왜 이제 보여준 거야? 그 말에 나 역시 내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고 대답했다. 사실이다. 사춘기 이후로는 어디에서도 이렇게 행동해 본 적이 없으니, 나조차도 이런 내 모습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왜 결혼을 하고 나서야 어린아이 같은 나의 모습이 드러난 것일까. 질문을 조금 확장하면, 남자는 왜 결혼을 하면 점점 짓궂은 초딩이 되어 가는 것일까. (내 주위의 표본을 모아보면 대체로 그런 경우가 많은 듯하다.)


나는 과거를 톺아보며 아내에게 초딩짓의 원인을 설명해보려고 했다. 






돌아보니 중학교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부터 얌전한 학생이 되었다. 매일 입는 교복 셔츠와 재킷이 꼭 어른 흉내를 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좋은 말로는 어른스럽게 사회화가 된 것이고, 안 좋은 표현으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초등학생 때는 선생님한테 혼도 많이 나고, 까불다 넘어지고 구르는 일이 허다한 아이였다. 물론 태생이 내향인이라 혼자서는 조용했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무리의 힘을 받아 장난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 시절의 고민이라 봐야 오늘 학교 끝나고 뭐 하고 놀까 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고 뛰고 뒹굴고 괴성을 지르며 웃고 떠들 수 있던 그때는 분명 지금보다 자유로웠고 행복했다. 


적절히 발산하고 살던 초딩 시절의 에너지를 단정한 교복 아래에, 사회인이라는 가면 아래 억누르며 어른이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유부남이 될 때까지, 나는 대체로 조용하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조금 안타까운 점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이를 하나둘 먹어갈수록, 인간관계는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의를 갖추고 경청하고 말을 고르다 보면 서서히 힘이 고갈되는 게 느껴진다. 일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을 만난 날은 두통마저 생기곤 한다. 일상 속 어디선가는 모든 가면을 내려놓고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뒹굴고 있어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만나면 편안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이제는 그들조차 온전한 모습으로 만나기엔 한계가 있다. 딱지와 팽이에서 주식과 부동산으로 넘어간 대화의 주제처럼, 그 시절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결국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는 아내가 유일하다. 여자친구가 아니라 아내다. 여자친구였을 땐 보여주기 어려웠던 모습도 아내가 되었을 땐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애와 결혼 후의 모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연애를 하던 시절에는 준비된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서 만나는 게 보통이지만, 결혼을 하고 난 후는 날 것의 모습을 공유하는 게 일상이기 때문이다. 감추려고 해 봐야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관계. 그러니까 어차피 나를 개방할 수밖에 없는 관계. 결혼은 타자와 완전히 섞이는 경험이다. 그런 면에서 결혼은 연애와는 차원이 다른 결합이다.


누구나 겉으론 어른인 체하고 살아가지만내면 깊은 곳엔 어린아이가 있다.


어른인 척하는 나의 가면을 하나둘 벗겨내면 결국 드러나는 것은 아직 사회화가 되기 전의 내 모습이 아닐까. 어떠한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며 행복한 상태. 그러니까 내가 당신 앞에서 자꾸만 초딩이 되는 것은 당신 앞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당신은 모든 가면을 벗어도 되는 안전한 존재이니까. 






그래. 오빠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나 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30년 동안 나도 모르게 감춰두었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모습이 결혼을 하고 마주한 것이다. 이 결론에 아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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