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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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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Feb 11. 2024

편지를 쓰지 않는 남편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언어

아내는 세 번째 결혼기념일에 손 편지를 받고 싶다고 했다. 아. 뭐. 봐서. 어물쩍 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대답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십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편지라는 말에 나는 늘 비슷한 반응이었고, 아내 역시 기념일이 되면 잊지 않고 한결같이 요구했다. 이만하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눈치를 보았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내의 눈빛에는 결기가 서려 있었다. 올해 결혼기념일에는 확실히 편지를 받겠다며, 분명히 대답하라고 재촉까지 하는 것 아닌가. 마지못해 알겠다고 했더니, 나의 대답을 재차 확인까지 했다. 알겠어. 알겠어. 쓴다고. 결국 항복하듯 말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편지란 단어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글쓰기모임도 하면서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 편지 한 통 쓰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비싼 척을 할까. 사실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까지 편지를 쓰면 항상 "미안하다"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연애를 하는 상당 기간 동안 나는 도서관에 머물렀다. 취업을 위해 자격증 공부를 하느라 살은 쪘고, 매일 슬리퍼에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이었으며, 무엇보다 가난했다. 가난의 진짜 위력은 부족한 잔고가 아니라 쪼그라드는 마음에 있다.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점철된 나의 청춘은 사람을 두려워하느라 집과 도서관 사이에 삶을 고립시켰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여자친구였던 아내는 먼저 취업을 했고, 둘 다 대학생일 때는 느끼지 못했던 현실의 벽이 우리 사이에 차츰 세워지기 시작했다.


"만약에 말이야. 우리 조금 어렸다면 지금 어땠을까." 가수 노을의 노래 가사를 들으며 눈물을 쏟곤 했다. 물론 "우리 조금 늦게 만났다면"이라고 가사를 바꿔야겠지만 말이다. 남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어느 시기에 만났느냐에 따라서 백년가약을 맺을 수도 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때 우리가 그랬다. 아내의 주변엔 그 남자와 헤어지라는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선배들이 생겼고, 그런 소리를 애써 외면하던 아내도 회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수시로 마음이 무너졌다고 했다. 회식 후 남편과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지하철을 타러 갈 때면, 커다란 외로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혼자가도 괜찮겠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애써 안 취했다고, 괜찮다고 웃으며 말하는 쓸쓸함. 차라리 솔로였다면 덜 힘들었을까. 당시 아내는 연인 있어서 더 외로운 역설적인 상황을 겪었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무심해져 갔다.


그 시절의 부채감이 해소되지 않아서, 편지는 늘 미안하다. 잘하겠다는 반성문이 되곤 했던 것이다.   






편지지에 글을 적기 전에, 노트를 펼쳐 이렇게 저렇게 끄적였다. 나는 여전히 아내에게 미안한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잠깐만. 그 시절 이후로 남자친구 노릇, 남편 노릇은 꽤 한 것 같다. 적어도 아내의 운전기사 노릇을 자처한 지는 사 년이 넘었고, 시간만 맞으면 어디든 데려다주고 데리러 갔다. 힘들었던 시기를 덮어 씌울 만큼 좋은 시간을 지금 보내고 있지 않은가. "미안하다는 말은 쓰지 말 것. 긍정적인 이야기로 쓸 것." 노트에 편지의 방향을 적었다.


언어가 곧 그 사람의 세계라고,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철학자가 말했다. 나의 언어가 힘들었던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습관적으로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 우리의 관계를 부채감 위에 올려놓고 말 테니까.


부부 사이에도 긍정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편지를 쓰던 중간에 "당신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라고 적었다. 쓰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차 보조석에 다 쓴 편지와 꽃다발을 놓고, 퇴근하는 아내를 픽업하러 갔다. 서프라이즈. 아내는 보조석 문을 열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편지가 좋았는지, 가는 내내 차에서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낭독하고.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 읽고 또 읽고, 그러다 나에게 직접 읽으라고 하고. 아.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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