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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진문화연구소 Nov 30. 2018

[5호] 나루생활사_별 것 아닌, 별것


 별 것 아닌, 별것 


나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그렇다. 보았던 것을 그림으로 다시 재현하면서 캔버스 안이 공간이 되고, 꿈꾸는 곳이 된다. 물론 내가 그리는 것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물과 풍경이다. 이런 흔한 풍경을 그리게 된 계기는 생각보다 별 거 아닌 것에 감동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무도 없는 놀이터, 새가 조잘거리고 있는 나뭇가지, 초록색이 무성한 공원, 커피 볶는 향이 좋은 작은 카페. 이런 공간에 대해 큰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기억한다. 운동화 아래 느껴지는 놀이터 모래의 질감과 소리, 하늘을 올려다 보기도 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곳. 비에 젖은 촉촉한 풀 냄새와 흙냄새, 비가 땅과 만나는 소리. 카페에서 로스팅 중인 원두의 향과 끝내주게 맛있는 커피. 그 커피 향이 머리칼에 스며, 나왔을 때까지도 은은히 감도는 향 까지…. 

( 나열하다 보니 책 한 권을 채울 수도 있을 것 같다! )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그 작은 기억으로 나는 그 공간에 다시 방문하고,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항상 복잡한 생각들을 하며 바삐 걸었다.

그 무엇을 하더라도 이유가 있어야 했고 복잡한 것들이 필요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단순하지 않게 되었을까…. 

지금은 어른이 되어버렸기에 어렸을 적 책상 밑에 커튼을 친 공간만큼 내 몸을 다 숨길 수 없지만, 여전히 잠시라도 편안히 마음 묻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매이고 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면 보통의 장소와 순간에서 별 거 아닌 것에 위로를 받고 안정을 받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힌 순간, 멈추어 선 곳에서 바라본 것들은 늘 지나쳐왔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 순간들이 새삼 다르게 다가왔고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내가 찍는 사진뿐만 아니라 주변 지인들도 네가 생각난다며 직접 찍은 사진들을 보내주기도 했다. 점점 사진이 쌓일수록, 그 날의 기억과 나를 생각해주는 따뜻한 마음이 커져가기에 그림일기처럼 기억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작업의 시작이다.


부드러운 곡선, 단순한 색감이 가득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언제 보아도 작은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그림….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별 거인 그림…. ( 생각해보니 굉장히 욕심쟁이인 것 같다. ) 

이렇게 보통의, 별 거 아닌 것에 위로를 얻고 그린 그런 과정의 심심한 그림이라, 누군가 ‘별 거 아닌 그림이네, 나도 이 정도는 그리겠다’라는 말을 해도 괜찮다.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더 쉽게 그림에 다가왔으면 좋겠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복잡한 것은 이미 너무 많으니까.


한국화 전공이라 주로 순지, 장지라고 불리는 한지와 전통안료로 작업하고 있다. 순지는 얇고 빛이 좀 더 잘 비추어지며 일반 한지보다는 좀 더 튼튼한 한지이다. 장지는 겹겹이 겹쳐진 좀 더 도톰한 한지이다. 약간 솜을 뚜드려 만든 도화지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주변에서는 굳이 전통을 고수할 필요가 있냐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옛 것에 매료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 쓸 예정이다. 물론 서양화 재료를 쓸 때보다는 작업 과정이 힘들고 더디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굉장히 와 닿는다.) 하지만 지금껏 반복했던 수많은 작업과정과 모든 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순간들로 인해 차분해지고 다듬어져 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유해나

디자인을   전공하다가 그림의 매력에 빠져, 세종대학교에서 한국화로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렵지 않은 그림으로 오랫동안 잔잔히 당신의 곁에서 함께 하고 싶어요. :)

Instagram  :  yu_haena  /  e-mail : sunny_pie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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