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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YOU Jan 18. 2016

직무적성검사 현실판

직무적성검사를 치른 적이 있다. 응시생들 사이에서 까다롭고 성적 안 나오기로 소문난 과목은 상황판단 영역이었다. 내 식대로 풀이해 보면 이 과목의 특성상 정답으로 보이는 보기가 여러 개이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상황판단 영역은 지문에 제시된 여러 조건을 종합해 가장 올바른 판단이 무엇인가를 묻는 과목이다. 보기를 보면 가장 올바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틀리지도 않는 판단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헷갈리는 거다. 요령이 있다면, 지문에 제시된 조건에서 핵심 쟁점이 무엇인지부터 판단해야 정답을 고를 수 있다는 것.


정답으로 보이는 게 여럿인 상황은 어떤 걸까. 시험이라는 것의 특성상 치르고 나면 싹 잊어서 시험에 나왔던 지문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현실의 예는 무궁무진하다. 한번 풀어보자.


#1

근무하던 사무실이 이사를 하면서 큰 건물에 세를 들게 됐다. 이곳의 여건상 사무 공간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해 준단다. 주중에는 쓰레기통을 직접 비워야 하는 등의 몇 가지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직원들은 금세 적응했다. 문제는 대표실이었다. 누군가 매일 대표실의 쓰레기통을 비우고, 사용한 컵을 닦고, 테이블을 정리하는 등의 일을 해야 할 상황이다. 누가 이 일을 맡는 것이 적당하겠는가.


A는 대표가 직접 할 일이라고 한다.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고 그 정도는 대표가 직접 해도 되는 일이며, 수평적 조직문화를 지향한다는 차원에서도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 B는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잡무이므로 대리급 이하 직원들이 순번제로 돌며 업무 부담이라도 줄이는 쪽으로 하는 게 좋겠단다. C는 왜 대리급 이하냐 과장이나 팀장도 포함하자고 한다. D는 대표실 정리는 잡무가 아니라 대표 보좌 업무에 해당하고 대표 보좌 업무는 사무규정에 따라 관리팀 사무이므로 관리팀에서 담당자 한 명을 지정하면 되겠다고 한다. 시험 문제로 치면 네 개의 보기가 주어진 셈이다. 어떤 것을 고르겠는가.


#2

공공기관의 사례다. 계약직 TO가 둘인데 한 명은 A팀에서 근무중이고, 한 명은 B팀에서 근무하다 퇴직해 한 달째 공석이다. 하루는 C팀장이 어차피 인건비 예산이 있으니 공석으로 두지 말고 C팀에서 쓰려고 하니 B팀은 현재 A팀에 근무중인 직원을 B팀으로 데려올지 A팀과 일을 나눠서 시킬지, 아니면 그냥 A팀에 둘지를 의논해 달란다.


A팀장은 계약직원이 현재 맡고 있는 업무가 안내 데스크 업무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일이고 대체할 인력도 없으므로 계속 자신의 팀에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B팀장은 각 팀의 어려운 사정은 중요하지 않고, 인건비 예산은 B팀 사업비에 속한 예산으로 두 명 모두 B팀이 써야 한다며 신규 채용자는 물론 현재 A팀에서 근무 중인 직원도 B팀으로 발령을 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C팀장은 예산근거와 무관하게 지금까지 필요한 팀에 배치해왔고 B팀은 지난 한 달 동안 문제없이 돌아갔으며 현재 C팀에 급박한 사유가 생겼으니 C팀에서 채용하겠다고 주장한다. 어떤 상황판단을 하겠는가.


#3

역시 공공기관의 사례다. 시민 대상 문화 강좌로 쿠킹 클래스를 운영하기로 하고 수강 신청하라는 공지가 나간 지 오래인데 갑자기 강사가 개인사정으로 강의를 못하겠다고 알려왔다. 당장 이틀 후면 신청 접수를 받기로 공지된 날이다.


A는 다행히 우리 기관에서 지원하는 베이커리가 있으니 그쪽에 맡기자고 한다. 평소 친분도 있고 유료 강좌라 크지는 않아도 수익이 발생하니 조금 무리한 부탁이기는 하지만 거절하지 않을 것이고, 갑자기 강좌를 취소하는 것은 공신력에도 문제가 된다는 주장이다. B는 강사 선정 과정은 투명해야 하는데 급하다고 아무런 절차도 없이 기존에 지원하고 있는 곳으로 정할 수 없고 더구나 수익이 발생하면 이중으로 지원 혜택을 주는 것이라 안 된다, 취소하고 어쩔 수 없는 사정을 빠르게 그리고 충분히 공지하는 쪽으로 일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상황판단이 적절하겠는가.


모두 내가 겪었던 일들인데, 축약해 적었지만 현실에서는 각자의 주장이 끝이 없었고 최종적으로 정리되기까지 한 달이 걸린 일도 있었다.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내가 응시했던 직무적성검사 출제 기관에서는 각 과목의 공부 요령을 홈페이지에 정리해 두었다. 상황판단 영역의 공부 요령은 “평소 토론을 자주 하되 결론을 미리 내놓고 토론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우리는 토론에 앞서 이미 자기 결론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시험으로 치면 여러 조건이 주어져 있는 지문을 아예 안 읽거나 일부만 읽고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


시험공부를 했던 경험과 현실에서의 경험을 종합하면 상황판단에서 중요한 것은 핵심 쟁점을 파악하는 일이다. 핵심 쟁점을 파악하려면 내가 어떤 조건의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여럿의 의견을 듣는 것이 유리하다. 여럿의 의견을 들어 주어진 조건을 확인했다면 그중 구조와 시스템에서 기인한 조건과 개인의 선호나 주관에서 기인한 조건을 구별해야 한다. 구조와 시스템에서 기인한 조건이 핵심 쟁점인 경우가 많다. 둘 다 구조와 시스템에서 기인한 조건이라면 그중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당초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명료해진다. 예컨대, 사례 1에서 ‘수평적 조직문화 지향’을 쟁점으로 삼는다면 대표실 정리를 대표가 직접 하는 것이 수평적 조직문화 달성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을 경우 얼마나 큰 해를 입히는지 판단해 보는 식이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위 사례들의 현실에서의 결론을 적어 보겠다. 첫 번째 사례는 대리 이하 전 직원이 돌아가며 정리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두 번째 사례는 예산근거에 따라 계약 직원 두 명 모두를 B팀에 배치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세 번째 사례는 강좌를 취소하고 취소 안내를 충실히 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첫 번째는 대표의 강력한 의지였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는 공공기관이라는 구조적 특성에서 기인한 쟁점이 판단 근거가 됐다. 즉, 상급기관과 의회의 감사를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공공기관으로서 회계와 업무 투명성을 우선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떤가. 전부 수긍할만한가. 아마 아닐 것이다. 나의 현실도 그러했다. 이 글을 쓰면서 언젠가 이런 글도 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하면 당신이 팀장 하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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