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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YOU Feb 01. 2016

간식 먹읍시다~ 나는 먹고 싶지 않다고!

대규모 조직 개편을 하면서 본부 하나가 신설됐다. 본부원 전체가 상견례와 교육을 겸해 3박 4일의 워크숍을 떠났다. 워크숍에는 ‘평화적 갈등 해결’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강사는 약간의 요령을 가르쳐 주고는 바로 실습을 시켰다. 나와 짝이 된 A는 남편이 가사와 육아를 분담하지 않는 갈등상황을 얘기했다.


“남편은 가사나 육아 분담을 전혀 안 해요. 이번에 여기 오는데도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시댁이 근처인데 시부모님도 아이 맡아주는 거에 흔쾌하지 않으세요. 그냥 워크숍 빠지면 안 되냐고 하시죠. 일주일 전부터 매일 시댁에 들러 냉장고 채워 넣고 선물 사드리고 겨우겨우 맡겼어요. 워크숍 와서도 저녁에 전화드리면 계속 싫은 소리 하세요. 힘들다, 하루 먼저 오면 안 되냐... 남편은 자기 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실, 나는 아주 행복한 직장 여성에 속했다.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살며 가사와 육아 부담 하나 없이 지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는 직장 여성의 고충에 무지했다. 내가 남편이 분담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찰나 A의 말이 이어졌다. “전에는 동료들에게 이런 얘기 많이 했는데, 그런 남자하고 왜 사냐거나 싸우라는 말만 돌아오니까 이제는 말도 못 하고 혼자 감당해요.”한다. 하려던 말은 쏙 들어갔다.


A의 상황이 다소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3박 4일 일정이 아이가 있는 여성들에게는 만만한 게 아니겠구나 하는 것을 A의 말을 들으며 처음 느꼈다. 내 일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거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내부 직원을 대상으로 <직장 내 양성평등에 관한 설문조사>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설문은 남녀를 구분해 다르게 설계했는데 양성평등 문제에 대한 남녀의 인식차를 같이 보겠다는 취지였다.


설문 중에 성차별적으로 느껴지는 문화, 상황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답변은 “1박 행사”, “남편은 무슨 일 하냐는 질문”, “간식 먹읍시다! 외치는 소리”, “일방적으로 정해지는 점심 메뉴 순대국밥” 등이었다. 내가 무감했던 것들이라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남편 뭐 하냐는 질문은 성차별을 떠나 무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아마 그 질문을 하기 전에는 결혼했냐는 질문부터 했을 터다. 안 했다고 하면 또 어떤 질문이 이어질지 알 만하다. 간식 먹자는 소리도 자주 들어왔었다. 간식 준비를 사다리타기로 정하는 팀도 있지만 하위직 여직원들이 움직이는 팀이 훨씬 많았으니 나온 답변이겠다. 설문지에는 ‘나는 안 먹고 싶다고!’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순대국밥은 남자 일곱에 여자 한 명인 팀에서 나왔을 것으로 짐작됐다. 웃음이 나면서도 답변 한 줄에 나름의 애환이 느껴졌다.


오래된 일이라 자세한 내용까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여성의 경우 남성에 비해 훨씬 일상적인 영역에서 차별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던 조사였다. 우리 팀은 분석 내용과 시사점들을 정리해 내부 게시판에 올렸다. 공감도 있었지만 별 걸 다 갖고 난리라는 분위기가 더 컸다.


늘 그랬던 것 같다. 20여 년의 직장 경험을 돌아보면, 여성이 제기하는 문제는 늘 사소한 것, 부차적인 것,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됐었다. (하기야, 여성뿐이겠는가.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처음에는 그렇게 치부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고 나면 달라져 있음을 확인하게 되곤 했다. 왜 똑같이 대학 졸업한 신입사원인데 남자는 홍길동‘씨’고 여자는 ‘미스’ 홍인지, 왜 남자에게는 제대로 된 업무를 주고 여자는 커피와 복사를 맡아야 하는지, 왜 여자는 결혼하면 당연히 그만둬야 하는지, 왜 여자는 대리 승진을 안 시켜주는지 하는 것들이 내가 직장생활을 한 지난 20여 년간 다툼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이다. 모두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제기로 여겨졌었지만 지금은 달라지지 않았는가.


이제 ‘미스 홍’이라는 호칭은 차별적이라기보다는 촌스럽게 느껴진다. 조한혜정 교수의 ‘공략하기보다 낙후시키’라는 말의 의미를 보여주는 사례겠다. 변화가 더디다고 생각될 때마다 떠올려본다. 조효제 교수는 저서 <인권의 문법>에서 인권 신장을 위한 모든 영역에서 여성인권 분야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가장 짧은 시간 내에 가장 주목할 성과를 낸 분야라는 설명이다. 나의 경험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떠올리며 가라앉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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